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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여자들만 아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는 고통스럽고, 힘들고, 험난하고, 이해할 수 없고, 비상식적인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들이 둘 이상 모이면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 수다를 떨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결혼한 여자들은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서로 공감하고 분노하고 연대한다. 바로 ‘시-월드’라는 세계다.
 
전통적으로 영화·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고부간의 갈등을 비롯해 시댁이라는 곳은 여자들에게 뭔가 불편한 곳이다.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는 30~40대는 남아 선호 사상이 거의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부모들로부터 “여자와 남자는 집안 일을 나눠 해야 하고, 여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사회 진출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또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명절 때 시댁에서 각종 노력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며느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시부모들의 행태가 많다. 명절 때 며느리가 친정에 가도록 배려하지 않는 시부모, 아들과 며느리에게 경제적으로 자꾸 의지하려는 시부모, 손자손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들 집에 너무 자주 들러 며느리 쉴 틈을 주지 않는 시부모, 말 한 마디를 해도 무조건 “내 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식의 내 아들 최고 지상주의에 빠진 시부모, 며느리가 임신을 해서 만삭이 됐어도 생일상을 꼭 챙겨받아야겠다는 시부모, 손주들에 대한 양육방식에 간섭이 너무 심한 시부모 등등 시부모들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시부모들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함께 분노한다. 반대로 나는 그런 시부모님을 만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나는 우리 시부모님께 불만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앞에서 말한 황당한 시부모의 언행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시부모님들이 내게 해주는 것들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냥 나를 부러워한다.
  

일단 우리 시부모님은 내게 바라는 게 없다. 그저 명절 때 손주들 데리고 와서 얼굴 보여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를 원하신다. 평소 가끔 손자손녀 목소리를 핸드폰으로 들려주고, 손자손녀 사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신다. 일하는 며느리가 일하랴 아이 돌보랴 얼마나 고생할 지 안타까워 하신다. 항상 “우리가 많은 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 또 “너무 바쁘고 힘들면 명절에도 내려오지 말고 쉬어라”는 말을 하신다. 비록 그렇게 말씀하셔도 나는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고향에 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힘들어도 명절 때 꾸역꾸역 내려간다.
 

추석 때 우리 집안에는 시할아버지 제사가 있다. 제사 준비와 차례 준비를 함께 하는데, 제사 음식 준비는 대부분 시부모님과 두 아주버님, 형님이 다 해주신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상태다. 많이 도와드리지 못하는 것에 시댁 식구들께 미안한 마음 뿐이지만, 4~5시간 때로는 10시간 가량 고생해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다 이해해 주신다. 그래서 나는 시댁에 가서 시어머님께서 차려주시는 진수성찬을 즐기고 잠 많이 자고 놀다 온다. 물론 나도 하는 일은 있다. 상 차리는 일과 설거지 정도다. 만약 아침에 내가 너무 고단해 늦잠을 자고 있으면 시어머니는 나를 깨우지도 않으시고 아침상을 차려주신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하면 시어머니는 “더 자라. 피곤한데. 더 자.”라고 말씀하신다.

 

IMG_7823.JPG » 큰아빠가 사주신 소풍 가방 세트로 즐겁게 노는 아이들.

 
시어머님께 또 감사할 일이 또 있다. 친정 엄마에 대한 배려 부분이다. 결혼을 하고 처음 맞은 명절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홀로 계신 엄마가 명절을 쓸쓸히 보낼 일을 생각하니 시댁에서 내가 웃고 있어도 웃고 있는게 아니었다. 삼촌댁에 가셨으면 했는데, 잠깐 다녀오시고 엄마께서는 “집에서 푹 쉬고 싶다”며 집에 계셨다. 결혼 전에 외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외할머니와 엄마, 나 3대가 주로 명절을 함께 보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나와 엄마가 오붓하게 명절을 즐겼다. 그런데 이젠 나마저 결혼해서 시댁에 오니 엄마 혼자 보내시게 된 것이다.
 
엄마 생각만 하면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고, 엄마에게 전화를 자꾸 하게 되었다. 그런 내 마음을 시어머니께서 아셨는지 시댁에서 준비한 차례 음식을 차곡차곡 예쁜 찬합에 담으시더니 “아야~ 엄마한테 이거 가져다 드리고 와라. 너희 엄마는 혼자인데 뭔 음식을 하고 싶겄냐~ 다음부터는 엄마한테 음식도 하지 마시라고 해. 우리가 가져다 드린다고. 너희 엄마는 여자라도 너희 할머니랑 관계가 각별해서 혼자라도 차례 드릴거니까 이 음식들로 차례 드리라고 해. 그리고 너도 엄마 보고 싶지? 엄마 보고 와.”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
 
아~ 이게 사람간의 정이란 것일까. 나는 정 많고 마음 따듯한 우리 시어머님이 얼마나 멋지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머님이 바리바리 싸주신 음식들을 해마다 엄마에게 전달하고 엄마는 그 음식으로 차례상을 꾸미시고 명절을 보내신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장 김치를 담글 때면 시어머님은 반드시 친정 엄마 김치까지 챙겨주신다. 내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우리집 김치를 때 되면 알아서 올려 보내주신다.
 

결혼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홀로 명절을 보낼 엄마가 걱정스러워 울먹거렸던 내가 이제는 엄마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는 명절에 아예 시댁에 매일 들러 손주들과 함께 놀고, 함께 맛있는 음식도 드시기 때문이다. 보통 명절 때 절반은 시댁에서, 절반은 친정에서 보냈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친정 엄마가 친정에 들르지 말라고 하셨다. 친정에는 엄마 혼자 사시기때문에 집이 좁아 아이들 놀기도 불편하고 엄마가 사위를 위해 음식을 하는 것이 자신 없다고 하셨다. 차라리 음식 잘 하시는 시어머니 음식을 많이 먹고 시댁에서 편히 쉬다 가라고 친정 엄마는 말씀하셨다. 대신 친정 엄마가 틈틈이 시댁에 들러 손주들도 보겠노라고. 그래서 지난해 부터 명절 때마다 엄마는 시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친정 엄마는 시댁에 빈손으로 오지 않으신다. 꼭 손에 정성어린 선물을 들고 오셔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신다.


IMG_7631.JPG » 시어머님의 정성 가득한 김치.  
 
내겐 시댁 식구들이 불편하지 않다. 든든한 지원군이다. 우리 시부모님 만큼만 며느리 배려해주면 그 어떤 며느리들도 ‘시-월드’ 세계 사람들을 욕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추석 때 시부모님 앞에서 아이들은 ‘그대 없이는 못 살아~’라고 드라마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아이들과 나는 말타기 등을 하며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평소에 집에서 하는 것처럼. 시부모님은 우리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마냥 좋아하셨다. 내가 시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당신들의 아들과, 당신들의 손주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일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 나 역시 행복했다.

 

추석 명절 때 시부모님과 친정 엄마가 손수 챙겨주신 각종 전과 나물, 고기, 생선, 송편, 잡곡 들로 냉장고가 빼곡이 찼다. 아이들은 큰아빠가 선물해주신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아이들의 기억 한 곳에는 고향과 추석에 대한 이미지가 하나씩 하나씩 형성되고 있다. 푸근하고 따뜻하고 정겨운 고향에 대한 이런 기억들이 아이들의 인생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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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블로그 : http://plug.hani.co.kr/an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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