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안된다고 훈계하는 부모와의 갈등은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숙명처럼
겪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어릴때야 마트에 잘 안 데려가고, 안 된다고 엄포를 놓고 단호하게 그냥 나오면 그럭저럭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방법이 톨할 수 는 없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친구집에서 보고 와서 조르고, 신문에 난 광고 보고 조르고 인터넷 보다가 졸라대기 일쑤다.
큰 아이에겐 무조건 안된다는 엄포가 통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 이름으로 수없이 배달되는 택배 상자들을 보는 아이들은 부모는 맘대로 사고
자기만 안 사준다며 억울해 하거나 감히 따지기도 한다. 엄마 아빠도 원하는거 다 사는거 아니라고
집안에 꼭 필요한 물건이라서 주문했다고 설명하곤 하지만 이런 설명이 다 떳떳한 건 아니다.
그래서 머리가 큰 아이와는 협상이 오고가게 된다.
아홉살 큰 아들은 요즘 영화 '스타워즈'에 빠져 있다.
처녀적부터 영화광이었던 내가 아들이 좋아할 것같아 보여주었던게 시작이었다.
우주선과 제다이 기사, 수없이 다양한 외계인들과 광선검, 레이저총, 우주에서의 전쟁 등
사내아이를 사로잡는 우주영웅 이야기에 아들은 완전 빠져 들었다.
1편부터 6편까지 영화를 다 보고 제작기도 다 보고 관련 다큐멘터리까지 섭렵한 아들은
스타워즈 장난감을 탐내기 시작했다.
아들이 원하는 건 '레고'로 출시된 스타워즈 시리즈다.
아들은 일곱살때 처음 접한 레고를 너무 너무 좋아한다. 그 작은 조각들을 맞추는 일에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빠져든다.
태어나서 이토록 열중했던 놀이가 없었기에 남편과 나는 살짝 감동해서 그동안 몇 몇
고가의 레고 제품들을 생일이나 성탄절에 안겨 주었다.
그런데 영화 스타워즈의 모든 케릭터들을 입이 딱 벌어지게 재현한 제품들이 레고로 나와 있는 것이다.
몇 몇 비교적 저렴한 모델들을 사주었지만 그걸로 성에 찰 리가 없다. 아들은 주인공들이 타던
우주선 모델들을 열렬하게 원하고 있다.
처음엔 무조건 사달라고 하길래 '안돼!' 딱 잘라 거절했다.
예상대로 아들은 엄마 아빠 것만 매번 사고 자기 것은 안 사준다느니, 제 적금을 깨게 해달라느니
안 사주면 집을 나가겠다거니 하는 소리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야단치고 설명하고 타이르다가
협상을 제시했다. 집안일을 도우면 용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어떤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지는 스스로 생각해서 적어 오라고 했다.
아들은 울고 불며 떼 쓰다가 뚝 그치고 종이를 가져오더니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빨래 널기 500원
빨래 개키기 500원
방 청소 200원
설걷이 400원
안마 100원
음식 만드는거 돕기 900원'
나는 남편과 상의해서 좀 과하다 싶은 항목은 금액을 조정하고 몇가지 새 항목을 추가해서 아들과 합의를 했다.
아들은 그날부터 당장 설걷이를 돕기 시작했다.
내가 수세미로 닦으면 헹구어서 건조대에 정리하는 일이었다.
처음 하는 설걷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다시 헹궈. 이렇게 뽀득 뽀득 문질러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옆에 서서 쉴새없이 일러주고 잔소리 해대는 엄마가 지겹기도 했을텐데 아들은 군말없이 일러주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그리고 가지런히 그릇을 정리해 놓고 물 묻은 손에 400원을 받아 갔다.
그 다음날엔 청소기를 돌리고 500원, 이불을 펴고 200원, 또 설걷이를 돕고 400원
빨래를 널고 300원을 받았다. 할 때는 한숨을 쉬지만 용돈을 받으면 용기백배해서 유리병에 넣으며
환호를 질렀다.
그 후부터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 뭐 할 일 없어요?' 묻는다.
'우선 널어 놓은 토란 좀 모아서 이 푸대에 담아줘. 300원 줄께. 그리고 해치가 싸 놓은 똥 치우면 또 300원!'
'알았어요'
아들은 군말없이 쪼그려 앉아 한 푸대 가득 토란을 담아 넣고 평소엔 그렇게 시켜도 절대 하지 않던
해치 똥을 집게로 담기 시작했다.
시켜도 안 한다고 하면 상관없지만 돈 받고 한 다고 해 놓고는 대충 하는건 용납하지 않았다.
빨래 널다가 몇 번 잔소리 듣고는 울컥해서 소리 지르다가도 '그럼 그만둘래?' 하면
'아니요. 할꺼예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하던일에 매달리는 아들이다.
눈앞에 목표가 있다보니 짜증나고 싫증나는 것도 견뎌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청소기를 돌려본 아들은 '너무 힘들어요'라고 했다. 엄마는 이걸 9년째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왔다고 했더니 '정말 힘드셨겠어요' 한다. '해보니까 엄마 힘든거 알겠구나?' '네..'
며칠 이렇게 지냈더니 함께 집안일 하면서 아들과 이런 저런 얘기 할 시간도 늘어나고
평소에 관심없던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깨닫게 되는 등 생각지 못했던 효과들이 늘어난다.
아들은 매일 밤 유리병에 모은 돈이 얼마인지 헤아리는 것이 큰 낙이 되었다.
아들의 돈벌이를 격려하기 위해 하루동안 여러가지 일들을 열심히 해 내면 남편이 조금씩 보너스를 주기로 했다.
일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오늘부터는 동생 윤정이에게 동화책을 한 권 읽어줄때마다 300원씩 주기로 했다.
녀석은 잠자리에서 동생이 골라온 옛 이야기 책을 신명나게 읽어 주었다.
내가 늘 어린 막내를 매달고 있어서 제대로 책도 못 읽어주던 둘째가 오빠 덕분에 신이 났다.
소리내어 책을 읽는 것은 발표력 표현력 개발에 좋다고 해서 일부러 시켜볼때는 절대 안 하던 녀석이
용돈을 준다니까 목청을 돋우어 재미나게 읽어준다. 그 덕에 나도 막내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300원이 안 아깝다.
일주일 가까이 집안일에 매달려 용돈을 모은 아들은 드디어 제 돈으로 제가 원하는 레고를
주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돈벌이의 끝은 아니란다. 사고 싶은 레고는 수없이 많기 때문이라나.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돈을 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안 좋을 수 도 있지만 아이의 동기를 강화시키고
스스로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이 더 큰 배움이 될 수 있도록 운영하는 묘가 있다면
꼭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홉살 아들은 요즘 돈벌이에 바쁘다.
슬슬 꾀가 늘어나는 엄마는 이 참에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일도 용돈 몇 푼에 아웃소싱해볼까..궁리중이다.
아들과 엄마의 동업...
과연 잘 될까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