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캐기 체험1.jpg » 고구마를 캐는 아이들.

 

 

생산성이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는 3시간이면 할 일을 요즘에는 6시간 걸려 작업하게 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 ‘멀티 태스킹’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토, 일에 이어 개천절이 있던 지난 3일,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기사 마감을 앞둔 나는 출근을 해야만 했다.
 
“여보~ 나 오늘 출근해야 해. 기사 마감 다 못했어. 되도록 일찍 마무리하고 올게. 얘들아~ 엄마, 오늘은 회사 가야해. 엄마가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고 빨리 올게. 재밌게 놀고 있어. 숙제도 하고.”
 
회사로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아 기사를 썼다. 생각만큼 기사가 빨리 써지지 않았다. 목표로 정해놓은 시간을 훌쩍 넘길 것 같았다.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도 못할 것 같았다. 써지지 않는 기사를 붙들고 끙끙대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메신저의 알림이 뜬다. 남편이다. 사진과 동영상이 도착했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는 순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곤충 체험 2.jpg » 곤충체험학습장에서 아이들이 곤충들을 둘러보고 있다.


“아이들과 재밌게 놀아줘” “아이들과 산책하러 좀 가지~” “아이들 텔레비전만 보게 하지 말고 뭐라도 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나왔다. 며칠 전 회사 선배들(남자)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남자들은 설거지 하려다가 아내가 설거지 좀 하라고 명령하기 시작하면 하기 싫어진다. 제발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잔소리와 명령이 제일 싫다"는 하소연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도 아이들과 어떻게 보내라고 명령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이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에 나섰다.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구청에서 운영하는 곤충체험학습장을 찾았다. 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키즈카페’도 들렀고, 옥상 텃밭에 들러 고구마 캐기 체험까지 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장수풍뎅이와 거미, 이구아나 등을 보며 신기해했고, 동영상 속에서 아이들은 고구마를 캐며 너무 즐거워했다. 고구마를 캔 뒤 남편과 아이들은 고구마 줄기를 까서 나물을 만들고, 고구마를 얇게 썰어 구워 먹기도 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없어도 아빠와 온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한 이 시간을 ‘행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떠올리겠지? 나는 남편이 보내준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며 편안한 마음으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기사를 다 쓴 뒤에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즐겁게 놀고 있다. 아이들과 남편의 변화가 새삼스럽고 놀라웠다. 엄마가 아침에 출근할 때 현관문까지 맨발로 뛰쳐나와 “엄마 오늘 꼭 회사 가야해?” “엄마, 언제 와?”라고 묻던 아이들이 있었다. 말끝마다 “엄마~ 엄마~”를 부르며 엄마 꽁무니만 쫓던 아이들이었다. 엄마가 없으면 잠도 안 오고, 엄마가 있어야 재밌고, 엄마가 늦으면  “엄마, 언제와?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며 전화를 해대던 아이들이었다.

고구마.jpg » 아이들이 캔 고구마.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이 훌쩍 커서 아빠와도 즐거운 휴일을 보낸다. 남편도 아이 둘을 데리고 하루를 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보낸다. 아이들과 남편을 보며 아이들의 성장과 남편의 변화를 확인한다. 예전에는 아빠와 있어도 뭔가 부족함을 느껴 엄마를 끊임없이 찾는 아이들 때문에 죄책감과 함께 불안감을 가지고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없어도 아이들이 아빠와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 지인에게 <10살부터 다시 키워라>라는 양육서를 선물 받았다. 아이들을 자립적으로 키우는 것을 양육의 목표라고 믿는 저자 다카하마 마사노부는 10살을 ‘아이에서 점차 어른으로 변해가는 시기’라고 규정한다. 10살 정도 되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자립하려는 독립심이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아이가 10살이 되면 부모가 아이에게 ‘홀로서기 선언’을 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오늘부터 너를 어른으로 대할 것이다. 더 이상 쓸데없는 잔소리를 안 할 테니까, 네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선언하라는 것이다. 10살 이후로부터는 아이를 아이처럼 대하지 말하지 말고 어른처럼 대하되 일정 정도 거리를 두라고 조언한다.
 
내년이 10살이 되는 딸의 눈부신 성장을 확인하면서 이제는 서서히 아이의 홀로서기를 염두에 두고 아이를 대해야겠다는 생각도 덩달아 해본다.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면 과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들도 늘게 되겠지 하는 기대감도 생긴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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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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