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79035_P_0.jpg » 한겨레 자료사진

 

이번주 초 약속이 있어 계속 늦게 집에 귀가하다 어제는 일찍 들어갔습니다. 일찍 들어온 엄마에게 아이들은 '번개맨 체조'도 보여주고 딸은 발레리나가 되어 발레하는 모습도 보여줬습니다. 한참을 함께 놀다가 잠잘 시간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낮에 낮잠을 잔 아이들이 잠이 오지 않는지 빗소리에 관한 얘기를 꺼냅니다.
 
5살 아들: 엄마~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와? 시끄러워 죽겠어.


7살 딸: 진짜? 나는 빗소리가 정말 좋은데~ 비가 꼭 노래하는 것 같지 않아? 엄마~ 나는 비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빗소리가 참 좋아.  
 
아빠: 그래... 이렇게 비오는 날은 잠도 잘 와. 세상이 모두 조용하고 빗소리가 잘 들리잖아. 아빠는 이런 날엔 낮잠도 잘 왔던 것 같아. 아빠 어렸을 때는 이런 날엔 낮잠 쿨쿨 자고 김치전 먹고 그랬었다. 아빠는 그런 비오는 날이 좋았어.
 
엄마: 엄마도 빗소리 참 듣기 좋다. 엄마 정말 오랜만에 빗소리 들어본다. 이런 날이 흔하지 않은데... 민규는 빗소리가 별로 안좋아?
 
5살 아들: 난 싫어! 빗소리가 너무 커. 시끄러워.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거야~
 
7살 딸: 야! 안민규~ 네가 자꾸 비한테 시끄럽다고 하니까 비가 화가 나서 더 세게 내리잖아~ 잘 들어봐~ 비가 노래하는 것 같지 않아? 잘 들어봐.
 
5살 아들: 노래라고? 아니야! 시끄럽기만 해. 더 시끄러워지네. 비~ 너! 조용히 하라고! 시끄럽다니까! 조용히 안해!
 
7살 딸: 야~ 네가 자꾸 비 화나게 하니까 비가 화가 나서 더 큰 소리를 내는거라고~ 네가 더 시끄럽다! 조용히 하고 비 노래하는 소리 좀 들어봐~
 
엄마, 아빠는 두 아이가 싸우면서 하는 얘기에 재밌어서 키득키득 웃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빗소리가 시끄럽기만 하고, 딸은 빗소리가 노래로 들립니다. 빗소리가 더 커지니 아들은 더 시끄럽다고 난리고, 딸은 아들이 소리쳐서 비가 화가 나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합니다. 같은 빗소리에도 이렇게 아들과 딸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서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습니다. 이렇게 모든 아이들은 다르고, 각자 자기만의 감성으로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이렇게 다르고 또 특별한 것이겠지요.  


하루하루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습니다.

빨리 잠을 자야하고, 빨리 일어나서 회사 갈 준비를 해야하고, 빨리 자료를 읽어야 하고...

빨리 빨리 해야 할 일 투성이죠.

 

그런데 어젯밤 아이들이 하는 대화를 들으며 아이들 때문에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빗소리를 들어보니 세상은 고요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

제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고,

비오는 날의 평범한 이 날의 대화를

나중에는 웃으며 다시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집에 살더라도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감격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감수성에 젖을 수 있어야 한다"

 

비 오는 어느 날 밤,

빗소리를 들으며

노래하는 소리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의 감수성이 있어

살아있는 기쁨을 느낍니다.

 

지은 지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이고

내 소유가 아닌 전세로 사는 아파트이지만

온 가족이

빗소리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집이 따뜻한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제게 따뜻한 집을 선물하고

메마른 저의 감수성을

촉촉하게 만들어줍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지

100일째 되는 날입니다.

하루 아침에 소중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님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아이들의 눈물로 느껴질 지 모르겠습니다.

 

까르륵 까르륵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없는

도란도란 얘기 나눌 아이들이 없는

그런 집이

부모님들에게는 얼마나 차가운 공간으로 느껴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무의미하며 슬프기만 할까요?

 

세월호 참사 부모님들의 하루하루를 다룬 티비 프로그램과

단원고 2학년 3반 아이들의 빼앗긴 꿈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보면서

울컥울컥 눈물이 납니다.

 

한달 용돈 5만원을 아껴 아빠 생일 선물을 사고

디자이너의 꿈을 꾸었던 예슬이,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예진이,

노래를 좋아해서 직접 노래를 작사 작곡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시연이 이야기를 보며

한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빨리 제정돼서

정확한 진상을 밝혀지고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해봅니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웃으면서도

세월호 참사를 당한 부모님들과

여전히 실종된 아이들을 찾지 못한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죄책감과 무기력감이 느껴지는 하루하루입니다.

 

진짜

모순 덩어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살아내야겠지요.

 

작은 힘이라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작은 목소리라도 내고

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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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블로그 : http://plug.hani.co.kr/an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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