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엉킨 실타래같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엄마의 마음이 그런 날은 안 들어도 될 잔소리와 야단을 맞으며

아이들은 주눅들고 억울한 저녁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엄마로서의 내가 미워지는 하루를 황급히 마무리하고 

잠든 아이들 얼굴을 들여다볼 때면, 이미 예견하고 있던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한없이 헛헛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보려 오소희씨 책을 뒤적인다.


이른 저녁, 몇 번이나 곁에서 어슬렁대던 아이는

일하느라 건성으로 응대하는 엄마를 떠나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한참 뒤 방문을 열어보니

방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다.

침대로 옮기려 안아들자

내 팔에 닿는 그 뺨이 차다.


아이에게 귀찮은 맘이 있었던 날 밤

자는 아이를 바라보면 더 애틋해진다.

공연히 찬 뺨에 입술을 대고

오래오래 엎드려 있다.

미안함이 옅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아이를 느끼고 있다.


                    -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 오소희 중에서 -


아이 곁에 엎드려 오래오래 아이를 느끼며,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던 일.

미안함이 옅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잠든 아이에게 속삭이던 일..

엄마가 미안해.. 오늘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다음부턴 안 그럴께. 조심할께..


매번 이렇게 다짐은 하지만,

나도 모르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다시 미안해 한다.

엄마가 된 지 12년.

엄마는 그냥 그렇게 서툴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고, 완벽하지도 않고

또 완벽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정말 내가 잘못했다는 걸,

나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내 감정을 제멋대로 발산하고 말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수습하기 어려운 괴로움이 마구 밀려든다.


유난히. 올해 그런 일이 많았다.

늘 핑계는 있었다.

몸이 안 좋아서.. 바쁘니까..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은데..

너희들 땜에 맡은 학부모회 임원일이 힘들어서..

너희가 엄마 말 잘 안 들으니까.. 너네 아빠가 안 도와주니까..

요즘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너희는 아니..


아이들에게 직접 말로 하진 않지만,

가슴 속에서는 늘 이런 말들이 차고 넘쳐,

아이들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언젠간 들키지 않을까 문득문득 두려웠다.


이토록 귀하고 고마운 너일진대,

어째서 엄마는 네가 열 번을 불렀을 때

그 반만큼만 간신히 눈을 맞춰줬을까.

어째서 네가 눈짓으로 몸짓으로 같이 놀고 싶다 했을 때

삼십 분 뒤에 했어도 좋을,

귀하지도 고맙지도 않은 그저 그런 일을 마저 마치려

모르는 척 미련스레 돌아섰을까.            

                                            

왜 '그저 그런 일들'은 아이들이 보챌 때

한없이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는 걸까.

이것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딱 5분이면 되는데..

몇 쪽만 더 읽으면 되는데..

네가 안 이러면 지금 이 일을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는데..




이렇게 나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이들 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흐뭇하고 대견하다.
나는 요즘 어쩌면 이런 좋은 순간만 즐기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12년동안 나도 할만큼 했으니, 이젠 육아의 단물만 빼먹으며 요령 좀 피워도 되지 않나,
여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느슨함을 무제한 허락하려는 속셈이 슬슬 피어오른다.
그래서 안 해도 될 실수를 번번히 저지르고, 후회와 자책을 반복한다.

그런 일이 너무 많았던 올 한해를 스스로 돌아보고 있는 요즘.
얼마전 생일을 맞은 나에게,
둘째가 내 목을 끌어안으며 깜깜한 잠자리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엄마, 많이 컸네요. 축하해요!"

아이는 자기 생일 때마다 듣던,
"많이 컸네.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라렴." 하는 식의 말을
나에게도 똑같이 들려주었다.

이 겨울밤, 네가 뱉어내는 마법의 말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차가운 것이 데워지고,

순간적으로 휑한 것이 아늑하게 채워진다.

오소희의 글처럼, 어른으로 사는 나의 이 삭막한 시간들에
따스함과 아늑함을 선물해주는 아이들의 언어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새해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날들이 조금은 더 줄어들 수 있도록
여유가 없는 순간마다 그 고운 언어들을 떠올리며 거친 마음을 달래고 싶다.

앞으로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한 일이 또 생기면
이젠,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먼저
오늘은 엄마가 미안했다고, 실수했다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렇게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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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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