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들녀석을 혼냈다. 아침 돌봄교실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침 돌봄교실은 학교 정규수업 시간 이전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프로그램이다.

왜 안 갔냐고 물었더니 요즘 돌봄교실에서 수학 문제집을 각자 풀게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러모로 그게 싫었단다.

 

그런 이유로 돌봄교실을 건너뛰고 비밀번호 눌러 교실로 직행해 학습만화를 읽었다고 했다.

수학 문제를 풀기 싫어서 그랬다니 누굴 닮아서 그러는 건지.(음... 내가 수학을 싫어하긴 했다)

여튼 그런 중대한 스케줄상의 변화는 아빠와 상의해야 한다고, 아침 돌봄교실은 가야 한다고 못박았다.

 

녀석이 요즘 돌봄교실에서 푸는 수학 문제집은 작년에 집에서 하던 학습지 중에 풀지 않고 쌓아둔 것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몇쪽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하니... 오늘 저녁밥을 먹으며 녀석이 돌봄교실에 흥미를 잃지 않을 '묘수'를 냈다.

 

 

456.jpg

 

 

“돌봄교실에서 바로셈 쉽게 하는 방법이 있어.”

“뭔데?”

“그 전날 집에서 바로셈 절반 정도를 먼저 해가는 거야. 그러면 돌봄교실에서 나머지 푸는 데 시간 많이 안 걸릴 거잖아. 남는 시간에 만화책 읽어도 되고.”

 

흐흐. 이건 뭐, 완전 조삼모사다. 원숭이보다 나은지 한 번 던져봤는데...

 

“그런데 전날에 그거 할 시간이 없을 거 같은데?”

“왜 없어. 태권도 다녀와서 해도 되고, 잠자기 전에 해도 되고.”

“에이, 시간 없을 거 같아. 그냥 돌봄교실에서 할래.”

 

‘그래, 니가 원숭이보다 낫구나’하고 대화를 마치려는데 녀석이 던진 한 마디.

“아빠 잔머리가 좋으시네요.”

헉.

 

“뭐라고?”

“잔머리가 좋으시다고요.”


의표를 찔렸지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다.

“너 잔머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데 엄마랑 아빠가 쓰는 말 들었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녀석은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의 얕디 얕은 '음모'는 이렇게 되치기 당했다.

 

*5월21일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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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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