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새학기는 한국보다 한달 정도 늦은, 4월 초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3월인 지금은 각 유치원과 학교마다 졸업과 입학식 준비와 함께

엄마들의 새학기를 대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인 때다.

250세대 정도가 모여사는 아파트와 100여 세대의 주택가로 이루어진 우리 동네는

아이들의 새로운 학년으로의 진급과 초등 입학을 앞둔 엄마들의 긴장과 설레임으로

두근반 세근반하는 분위기다.


누구누구랑 같은 반이 될까.

아이들은 서로 성격이 맞을까.

엄마들과는 원만하게 잘 사귈 수 있을까.

소문이 안 좋은 엄마랑 같은 반이 되면 어떻하지.

혹시 우리 아이가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면 어떻하나.

제일 중요한 담임 선생님을 제발 잘 만나야 할텐데...


잠시 잊고있다가도, 한번 걱정이란 걸 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관계들에 대한 불안과 근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속속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번은 둘째 아이의 초등 입학이라 비교적 여유가 있긴 하지만,

아이와 엄마인 내가 매번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서게 될 즈음에는

평소엔 둔하기 그지없던 상상력에 훨훨 날개가 달리는 것만 같다.

온통 부정적이고 어두운 상상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어찌나 술술 써지는지,

설마.. 그럴리가.. 하면서도, 절대 그렇지 않을거란 확신은 또 들지 않아 괴로워진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처럼 사람들 관계를 24시간 언제어느때든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어줄 수 있는 매체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갖춰졌음에도

어떻게 된 것이, 인간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일까?

큰아이가 초등 입학을 했던 5년 전에 비해, 아이들 관계도 엄마들 관계도

더 까다롭고 섬세한 스킬이 필요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사소한 말이나 행동도 더 조심스럽게 의식하며 해야 하고

문자메세지로 연락할 때, 단어 선택이나 어미 처리, 이모티콘 하나하나까지 별 생각없이

멍 때리며 보냈다가는 가끔 큰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문자 메세지를 통해 엄마들과 벌일 수 밖에 없었던 미묘한 신경전과 밀당은

정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다 아이들을 위해서 애쓰는 관계들인데도, 아이들 제대로 돌봐야 할 밤 8-9시같은

황금시간대에 문자메세지를 최대한 '매너있고, 교양있고, 근사한 엄마'처럼 작성하느라

고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때의 상황과 나 자신에게 매순간 화가 나곤 했다.

문자메세지를 둘러싼 이런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요즘 일본에선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종종 언급되고 있을 정도고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 여성들의 세계는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관계의 기술이 필요한데

아이를 사이에 둔 엄마들의 관계는 그래서 한층 조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새로운 만남과 관계가 늘 이런 어려움만 안겨주는 건 아니다.

얘기하자면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생략할 수 밖에 없지만, 정말이지 작년은

히키코모리가 되고 싶을만큼 몇몇 엄마들과의 관계가 힘든 한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소수지만 봄 햇살처럼 맑게 반짝이는 엄마들과의 관계도 있었다는 것.

생각만 해도 실실 웃음이 나는 좋은 만남이 있었다는 거.. 사는게 참 신기하다.
어디서 이런 보석같은 엄마가 숨어 있었을까! 싶은 사람을 만났는데..

우리 동네에서 작년부터 입주를 시작한 새 아파트로 이사온, 큰아이와 같은 학년의 친구 엄마인데
이 엄마 덕분에 새 아파트 내부에 있는 파티룸에서 유익한 시간을 참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요즘 아파트들은 대부분 입주민들이 이용가능한
공동 파티룸이나 공동부엌, 키즈룸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전에 살던 아파트에도 이런 시설이 있어 자주 이용하고 즐기긴 했지만,
10여년 전에 지은 아파트에 비해 훨씬 쾌적하고 진화된 공간이라 갈 때마다 무척 즐거웠다.

DSCN3869.JPG

<일본 엄마들의 주요 사교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최근 아파트의 공동 파티룸 모습>


그 엄마는 아이를 넷이나 키우고 있임에도 불구하고, 늘 자발적으로 모임을 제안하고

공동 파티룸을 예약해줘(입주민이 예약하면 외부인들도 함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학교 학부모 회의는 물론, 동네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초등 신입생환영회, 등교길 교통지도를 위한 부모 모임,

엄마들의 취미나 사교 모임 등등 굵직한 행사들을 아주 저렴한 이용료로(3시간에 5천원 정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린 막내를 업고 안고 다니면서도, 아이들과 엄마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신속하게 이 공간을 예약하고 모임 시간보다 빨리 도착해 간단한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모임의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맡아하면서도 늘 한발 물러서서 모두가 의미있고 좋은 시간을

나눌 수 있도록 지켜보며 배려해 주었다.

그녀는 새로 이사온 동네 엄마들과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이, 자신의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 마을에서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DSCN4362.JPG

이 아파트 파티룸에서 가졌던 좋은 시간들이 참 많은데, 그 중에 기억나는 하나는
아직 서로 낯설고 어색한 동네 엄마들의 친목을 위해 <핸드메이드> 강좌를 연 것이다.
지난 겨울에 있었던 이 모임에서 만든 <봄 리스> 사진인데, 3월이 되면서 집 안에 걸어두니
바깥 날씨는 아직 춥지만 이걸 볼 때마다 마음만은 화사해지는 기분이 들고,
좋은 시간과 공간과 함께 성과물(?)까지 얻을 수 있게 해 준 그 엄마가 두고두고 고맙다.

몇 년전부터 일본에선 '죠시카이'(女子会)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골치아픈? 남자들은 빼놓고, 같은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맛있는 거 먹으며 수다를 즐긴다는 뜻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여자들과의 관계 이면에 자리잡은, 동성끼리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이런 죠시카이 문화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다.
엄마들 관계에서도, 아이나 남편, 집안 이야기보다 또래 여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맛있는 음식과 시간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보니,
동네 학부모 회의가 있을 때면, "후딱 회의 해 치우고, '걸즈토크'나 하자."는 식의
얘기가 나오곤 한다.
이런 엄마들의 긍정적인 사교모임의 공간이 되어주는 게 바로, 아파트의 파티룸인 것이다.

이제 곧 아이들이 입학을 하고, 조금 한숨돌릴 때가 올테니
4월 쯤에 <동네 엄마들만의 브런치>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파티룸 통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봄햇살을 받으며,
폭풍육아 13년만에 둘째까지 드디어 학교보낸 뿌듯함을 맘껏 누려보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다.
큰아이들이 올해 모두 6학년이 되는 엄마들과의 만남이라,
초등 마지막 학년과 중학교 진학관련된 고민과 공감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작년처럼 피곤한 스타일의 엄마들을 올해도 어김없이 만난다 해도(덕분에 면역력도 길러진듯;;),
놓치면 큰일날 뻔 했던 이런 소중한 엄마들과의 만남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새학기. 좋은 엄마들과의 만남은
어쩜 우리가 한창 연애하던 시절, 좋은 남자를 만나는 일처럼
어렵고 드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야를 넓게 가지고, 관계의 안테다를 높이 세우다 보면
거짓말처럼 꽤 괜찮은 엄마들을 세상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는 사실, 지나칠만큼 혼자있는 걸 좋아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강해서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불특정 다수의 엄마들과 늘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었다.(지금도 여전히 귀찮고 힘들다ㅠ)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정말정말 엄선(?)해서 꼭 필요한 만남에만 참석하는데도 나와 안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오면
하루를 망친 기분이 들고, 아이들에게도 짜증을 쉽게 내게 되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런데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고 영혼이 건강한 엄마와 잠깐이라도 함께 있다오면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는 걸, 엄마라면 다들 공감할 것 같다.
다 이 맛에 엄마 노릇 하는 거 아닌가요?^^
한비야 씨의 <1그램의 용기>라는 신간 소식을 들었는데
우리 엄마들에게도, 많이도 말고 딱 1그램만큼의 용기만으로도
'참 괜찮은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걸 잊지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참, 이건 13년동안 육아를 하면서 새삼 느끼고 있는 건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이미 알고 지내던 엄마인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재발견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
너무 멀리서만, 뉴페이스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미 알고 지내던 엄마들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말길.
선입견, 편견, 의심과 망설임을 거두고
일단은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것도 필요하다.^^
새학기를 맞이한 모든 엄마들에게 용기와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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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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