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숲으로 간다.

알록달록한 색을 입힌 미끄럼틀이나 그네만 있으면 얼른 달려가는 아이들이지만

그런 도시의 놀이터마저 지겨워지는 날은, 망설임없이 작은 숲으로 고고씽!

우리 가족이 숲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할 때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대부분이다.

캠핑문화가 일상이 된 요즘은 아이들에게 자연체험이나 숲 놀이를 맘껏 경험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우리 부부가 주말 나들이를 숲이나 공원으로 정할 때는 바로 돈이 없을 때다.


대형마트같은 데만 가도 자잘한 물건을 사느라 얼마,

4식구가 대충이라도 점심을 때우기 위해 얼마,

또 분명히 각각의 마트마다 장난감코너가 어딘지를 기가 차게 잘 기억하는 둘째 녀석이랑

벌일 실랑이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통이 날 것 같기에.

그래서 이런 날은 돈 쓸 유혹이 아예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게 정답이다.

이왕이면, 그 흔한 음료수를 파는 자동판매기조차 없는 곳으로.

그러고 보니, 숲은, 자연은, 공짜네?!




집에서 30분 쯤 차를 달려 작은 숲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풀어놓으니

코스모스 꽃밭을 지나 여기저기 떨어진 단풍잎이랑 도토리를 줍느라 한동안 고요~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를 들여다보더니, 거울이라면서 한참을 또 놀고

긴 나뭇가지 주워서 칼쌈놀이.. 그러다 아이들이 뭔가를 발견했다.

큰 나무들 사이에 걸쳐둔 그물침대! (이걸 한국어로 뭐라하는지 기억이 안나네;;)

아이들이 한참을 타고 놀다 나간 자리에는 아빠가 냉큼 들어가 누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나무와 밧줄로 만든 그네가!

빨강머리 앤이 나무 그네타는 걸 부러워하던 초등 딸은 곧바로 재현을..

또 조금 더 가다보니, 비탈진 곳에 큰 밧줄들을 매달아 아이들이 그걸 타고 놀게끔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다른 아이들도 줄을 서서 타며 즐기는 걸 보니, 시설도 제법 안전한 편인 것 같은데

도대체 이런 걸 누가 다 만들어놨을까?



처음엔 숲을 관리하는 시에서 설치했나보다 했는데

아이들의 모험/놀이를 지지하는 한 시민모임에서 만들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평범한 가족들로 이루어진 이 모임 회원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 숲에서 매달

정해진 날에 자연 재료로 만든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다른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이분들의 아지트는 아예 숲 입구에 커다란 테이블을 두고 공작도구를 펼쳐두었는데

숲에서 놀다가 엄마아빠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와 크고작은 나무토막을 망치, 톱으로

자르거나 다듬어서 장난감을 만들곤 했다. 

뭘 만드는지 한 발을 나무 위에 걸치고 톱질하는 엄마 - 멋있었다.


아! 저런 걸 집안이 아니라 밖에서 해도 참 좋겠구나!

집안 어지럽힐까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되고, 공간도 탁 트여있어 좋고

잔나뭇가지나 낙엽같은 건 즉석에서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가 만든 나무 장난감을 큰 나무에 전시하듯 아이들이 걸쳐둔 걸 보니 참 좋아보였다.

이런 걸 정기적으로 주말마다 한다면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경험이 될까.

문화센터같은 데서 배우는 만들기 교실같은 곳보다 돈도 들지않고,

감성과 상상력이 몇 배는 더 쑥쑥 자랄 것 같다.

따뜻한 가을 햇살과 기분좋게 부는 바람, 싱그런 숲 냄새, 새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속에서 시간에도 쫒기지 않고 느긋하게 만들다가, 놀다가, 재잘대다가, 먹다가 마시다가..

모임 회원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게 많아진 우리 부부는

우리도 이담부턴 종이랑 색연필이라도 가져오자, 글쓰기나 그림그리기로 가족사생대회 하자,

자극받고 다짐하고 그랬다.



좋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로 좋은 기운을 얻은 뒤,

가을 햇살과 나무 그늘이 반반쯤 머무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 까먹는 재미는 숲 놀이의 하일라이트.

역시 먹어야 살 맛이 더 나는 아이들은 다시 숲놀이에 홀릭~

잠시 아이들 돌보는 노동에서 해방된 아빠는 쿨쿨 낮잠,

종이책 중독자 엄마는 가을하늘 한번, 책 한번 번갈아보며 방임육아의 기쁨을 만끽.

그렇게 하루종일 잘 놀다 무언가 많이 배운 듯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 주말 해가 질 무렵이면 늘 그렇듯이 남편과 나는 나들이 평점을 매겨본다.

오늘의 제 점수는요~


100점 그 이상이다. 공짜로 놀다왔으니, 돈을 많이 쓰고난 다음의 씁쓸함이 없어 좋고

간만에 몸을 많이 쓴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떡실신이라 조용해서 좋고

주말이면 가는 곳마다 널린 온갖 청량음료와 인스턴트 음식, 사탕, 초콜릿 땜에 아이들과

씨름하지 않아서 맘 편했고, 뭣보다 몸은 피곤한데 너무 쾌적한 피곤함이랄까 -

자연 속에서 그동안 쌓인 뭔가를 정화시키고 난 상쾌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햇빛, 바람, 물, 공기

아이를 키우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우리는 이미 다 가졌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 숲으로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가 보자.

그곳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아이들 몸 속에, 마음 속에 감성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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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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