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 덜컥, 혹은 꿈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바람둥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깊은 상처를 겪은 여자가

다시 그녀를 찾아온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처음 사랑을 했고

그게 얼마나 황홀하고 달콤한 건지 알았고

그리고 그게, 좋기만 한 건 줄 알았던 그게,

단 한순간 비수로 돌변해서 내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드라마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면서 배고프고 잠이 오는 둘째가

앞치마를 잡아당기며  칭얼대는 걸 받아주고 있는데..문득, 마음에 남았던 그 대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말이, 어쩜 육아와도 비슷하단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거다.

 

처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아이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황홀하고 달콤한 건지 알았고

그리고 육아라는 것이, 좋기만 한 건 줄 알았던 그게,

단 한순간 비수로 돌변해서 내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사랑도 육아도 그렇다.

그 황홀하고 달콤한 것이, 어느 정도의 엄청난 강도이며

아이를 키우며 겪는 수많은 혼란과 고통들이, 여자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가슴 먹먹했던 주인공들의 사랑만큼 아이를 키우며 지내온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크고 작은 사랑을 겪는 20대가 한참을 지난 지금 나이에 들어서 보니,

사랑의 상처로 허우적대는 여주인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거다.

'너는 그래도 좋겠다.

나중에 나이들면 저런 남자랑 연애해 본 추억이라도 남잖니.

쫌 아프겠지만 힘내서 더 실컷 사랑해봐. 끝까지 한번 가봐.

도망가지말고 네 감정과 정면으로 맞서봐.

너를 좋아하고, 너도 좋아하는 남자 만나기가 그리 쉬운줄 아니?!'

 

어느새 나는 아픈 것이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려는 드라마속 여주를 맘속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철없던 어린 아가씨가 아픈 사랑이지만 그걸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게 너무 이뻐서

연애의 전성기에 서 있는 그녀가 달콤한 것도, 끔찍한 것도, 다 스스로 겪어보길

맘속으로 응원하고 부러워하며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육아의 전성기에 서 있는 나의 현재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래 어차피 이 시기도 다 지나면 끝인걸, 이왕 하는거 연애처럼 화끈하게 해보는 건 어떨까.

육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말고, 이렇게 드라마를 보듯 한발짝 물러서서

더 늦은 중년의 나이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나는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아이와 함께

반짝반짝 빛나는 여자의 삶,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다.

친정엄마가 겨우 서너살된 어린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

그 사진 속 나의 엄마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워 보였던가.

지금 이 순간 나의 모습이 바로 엄마의 빛나던 한때, 그 모습과 같지 않을까.

 

드라마 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음들의 사랑도, 나의 추억속의 연애들도

그렇게 다 좋은 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멀쩡하던 마음이

시궁창에 버려지는 듯한 아픔도 겪고, 비참하고 초라한 기분에 자존감은 다운되고..

육아도 그렇지 않은가. 내 뜻대로 되지않는 상대 때문에 늘 노심초사했던 것처럼

아이와 하루에도 몇 십번은 반복해야하는 밀당과 신경전..

어디, 마음에 생채기 하나 내지않고 얻어지는 사랑이 있던가.

옷자락 하나 더럽히지 않고, 새하얀 홈드레스 차림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던가 말이다.

 

유난히 나에게 매달리며 분노를 쏟아내던 아이땜에 너무 힘들었던 지난1년을 돌아보니,

내가 너무 아이 자체에만 집중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성격이 왜 이럴까,

이 아인 뭐가 문제인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다른 아이와는 왜 다를까..

육아도 연애도, 너무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집착하게 되면 힘들어지는 것 같다.

 

연애가 좋은 이유는 그 사람 자체도 있지만, 그와 나를 둘러싼 감성 충만한 분위기 때문이지 않나.

라디오와 함께 육아를 즐기신다는 아빠처럼, 좋은 음악도 듣고 좋은 음식도 즐기고

변해가는 계절도 깊이 느끼면서, 육아를 할 때도 너무 아이 자체에만 집중하기 보다

그 배경을 이루는 것들을 즐기며 가끔은 아이에게서 한발 물러나 있고 싶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아이는 부모에게 힐링 선물을 한다발 안겨주기도 하는데,

얼마전 유치원에서 고구마 캐기를 다녀온 아이에게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물었더니,

"응, 흙이 따뜻했어!"

아... 이렇게 자연친화적이고 감성적인 말을 들려준 남자는 아들이 처음이다.

의도하지 않은 천진난만함으로 언제든 위로받을 수 있는 것,

연애와는 또 다른 육아의 순기능..

 

주인공들의 로맨스 구경이 드라마의 젤 큰 재미이긴 하지만, 큰아이가 제법 크고 나니

남주와 여주 부모들의 대사에도 솔깃해지곤 한다.

온갖 정성 다해 키운 외동아들이 처갓집 살이를 하게 될 처지에 놓이자, 그의 엄마가 하는 말,

"좀 더 후지게 키웠어야 남 줄 때 안 아까운 건데..."

아들이 손해보는 결혼을 하는 것 같아 속상해하는 아내에게 아버지인 그녀의 남편은,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쌓은 노하우는 저 아이를 키우면서 다 가르쳤다,

아이가 그걸 선택할지 아닐지는 이제 그의 몫이다.

그렇게 위로하는 남편에게 아내인 엄마는 가슴을 치고 울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왜 그게 잘 안될까..."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나도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게 말이예요!!!..

그게 왜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걸까요..ㅠ.ㅠ'

 

오랫동안 벼르다 올해 본 두 편의 드라마로 연애와 육아공부, 제대로 했다.

아~~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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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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