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어느 날씨 좋은 봄날이었다. 만삭의 아내와 오랜만에 시내에서 데이트를 했다. 주말 거리를 걷다가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고궁을 거닐고 옷가게에서 쇼핑도 했다. “내일부터는 둘이서 이럴 기회가 많지 않을거야”라며 웃었다. 출산 하루 전이었다.

집으로 온 임산부는 삼겹살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아이 낳을 때 힘을 쓰려면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 했다. 정육점에 다녀와 집안 곳곳에 냄새가 가득 배도록 삼겹살을 구웠다. 지금도 아내는 “그날 먹은 삼겹살이 최고였어”라고 한다.

고기로 배를 채운 임산부는 과자를 사러 가자고 했다. 분만실에서 심심하고 출출할테니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럴 듯했다. 30여년 전에 내 자신이 태어난 때 말고는 분만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뭘 알 리 만무했다. 마트에 가서 과자를 한아름 사왔다. 주스로 건배를 했다. ‘출산 전야’가 그렇게 깊어갔다.

출산 전날을 이렇게 나름 계획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첫아이가 유도분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뱃속 아이가 너무 잘 자라서 40주를 다 채웠다간 너무 클까봐 염려스러운 상태였다. 결국 유도분만으로 출산을 3주 가량 앞당겼다. 갑자기 진통이 올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게 그리 높지 않은 시기였다. 출산 전날엔 마지막 외출과 삼겹살 만찬의 여유를, 출산당일엔 하루 휴가를 내고 아내와 손잡고 병원에 가는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한들, 어디 출산이 쉽던가. 더욱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임산부와 그 남편 아니던가. 일단, 간호사들이 “과자를 사오면 어떡하냐”며 나를 타박했다. 분만 땐 금식이 원칙이다. 극심한 진통으로 일어나는 구토가 호흡을 곤란케 할 가능성이 높다. 또 출산 전엔 배변과의 ‘교통정리’를 위해 관장도 한다. 뱃속을 비워야 할 판에 뱃속을 채우려들었으니 혼날 만도 했다. 과자 봉지는 냉큼 치워버렸다.

유도분만의 끝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아내는 유도분만이 차질을 빚으면 제왕절개로 가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나마 본인의 몸에 오는 변화라 나름 알아보고 준비를 한 임산부가 그 정도였다.

남편은 그마저도 쫓아가지 못했다. 병원에 가기 전 아내가 읽어보라며 준 글은 솔직히 실감이 가지 않았다. 출산에 앞서 몇주동안 ‘출산교실’도 다녔지만 기억에 남은 건 마사지법과 호흡법 뿐이다.

분만실.JPG » 한겨레 자료 사진.

더욱이 가족분만실이었다. 차라리 드라마에서처럼, 분만실 밖 복도에서 시계만 쳐다보며 초조해 하다가 간호사의 “아들입니다” 하는 말에 환호하는 역할이라면 실수없이 해냈을지도 모른다. 가족분만실엔 간호사가 늘 붙어있는 게 아니었고, 진통에 허덕이는 아내와 단둘이 덩그러니 남았을 땐 정말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

한번은 정신줄을 놓은 아내가 “으악! 간호사 좀 불러와!”라고 했는데 나갔더니 다들 옆방서 아이를 받느라 아무도 없었다. 다시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데?”라고 했다가 혼쭐이 났다. 그제야 ‘똥꼬에 수박이 낀 느낌’이라는 표현이 생각났고, 통증과 짜증으로 범벅이 된 아내의 심리를 이해했다. 난 다시 밖으로 나갔고 사람을 찾을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진땀을 뺀 지 몇시간, 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씻기고 있었다.

둘째는 항상 첫째의 기억과 비교당한다. 우리집은 입덧은 덜했고, 태동은 더 활발하고, 산모 몸은 더 가볍다. 새로움은 덜하지만 두려움도 덜하다. 둘이 들어가 셋이 되어 나오는 그곳이 이번엔 어떤 풍경이 될지, 기대와 설렘 속에서 첫째 탄생의 기억을 되새긴다.
 
** 이 글은 월간 육아잡지 <맘&앙팡>(디자인하우스) 2012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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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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