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97> 다들 보셨는지요?

저는 2001년에 결혼하고 바로 일본으로 와서인지

아직 저의 한국시계는 2001년 아니, 1990년대에 머물러 있는 걸 많이 느껴요.

가끔 한국 다니러 가서 친구들에게 제 생각을 얘기하다보면

'언제적 얘길 하는 거냐' '그건 10년 전 얘기지'하는 소릴 많이 듣게 되죠.

그래서 응답하라는 저에게 과거 얘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같아 반갑고 공감되는 이야기였어요.

얼마 전에 이곳 도쿄에서 서인국이 나오는 콘서트가 있었는데 바로 표 끊고

무대  앞 네 번째 줄에서 보고 왔답니다^^

 

한국에선 이제 아날로그적인 그 무언가들이 90년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정서가 되었을까요? 굳이 시간여행을 하지 않으셔도

지금 바로 일본의 육아현장으로 오시면 충분히 경험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세 살까지도 느긋하게 엄마젖먹는 아기들(저희집 두 아이도 만 세 살가까이까지 젖 먹었는데

여기선 그런 게 자연스러워요. 문제는 한국에 갔을 때죠. 모두들 까무러치듯 놀라는데

그럴 때면 제가 일본이 아니라

아마존 정글 속에서 아기 키우다 불쑥 나타난 엄마같은 느낌이 드는데,

아이에게 여긴 한국이니까 젖 먹으면 안돼-라고 할 수도 없고 늘 곤란했던 기억이...)

기저귀도 두 돌 지나서 천천히 떼고

유아기에 영어를 배우거나 학원을 다니거나 하는 아이들도 거의 없이

그야말로 일본 아기들은 먹고 자고 노는 게 세상의 전부죠.

그러다 유치원을 가게 되면 3년동안 다니며 쓰는 가방이나 소품을 모두 엄마가

만들어 주는 초아날로그적인 문화가 아직 남았습니다.

사진에서처럼 가운데 빨강색은 실내화주머니, 왼쪽은 급식을 먹을 때 밑에 받치는 매트와 그걸 넣

는 주머니(두개가 한 세트), 오른쪽 네모난 건 이런 자잘한 주머니와 체육복 등을 모두 모아 넣는

가방이구요. 모두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만 세살 정도 되면 엄마랑 아이들이 천 가게에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나 무늬의 천을 고르고 또 거기에 어울리는 실,끈, 바이어스, 리본, 단추 등 소품을 고르는 게 유치원 입학 전에 하는 일이예요.

구입한 재료로 엄마들은 집에서 미싱으로 완전 홈메이드로 만드는데

처음 이 사실을 안 나는 공포에 휩싸였죠. 뭐든지 손으로 하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미싱은 만져본 적도 없고 바느질 같은 일은 웬지 시간낭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럼, 일본 엄마들은 무슨 재주로 저런 걸 다 만든다는 말이지? 어디 학원에 가서 배워오나?? 

알고보니 일본에선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가정과 수업으로 미싱을 배운다네요.

그래서 조금 더 잘하고 못하고의 개인차가 있을 뿐, 모두가 미싱을 다룰 줄 안다는 것.

나도 일본 친구들에게 조언을 들어가며 미싱을 사서 해 보니

오호~이게 또 만드는 재미가 장난이 아니네^^ 기본만 배우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실과 천만 있으면 몇 십분만에 후딱 가방 하나가

완성되는데 나중엔 레이스를 달거나 하는 저에겐 난이도가 높은 기술까지

터득하는 기쁨을 맛보았답니다.

 

그런데!  뭣모르고 제가 선택한 유치원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더군요.

다름아닌 베낭까지 만들라는!!  헉 - 이 일을 우짜지 - 그라지 마라 캐라ㅜㅜ

웬만한 유치원에선 베낭까지 만들라고 하진 않는데 이런 무리한 요구에도

엄마들은 귀찮아하면서도 내심 즐기는 듯한? 분위기더군요. 누비천으로 만든 이 베낭은

아이들이 소풍갈 때, 고구마캐러 갈 때 가져가서 고구마를 담아오거나 할 때 쓰는데요,

어깨에 매는 끈 처리나 가방 뚜껑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것 등은 초보에게 꽤 힘들어요.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가격을 물어보니 헉 - 5만원 정도 든다는데;;

그래도 한 번 만들고 나면 그게 경험이 되어 실력이 확 늘게 되더군요.

무엇보다 다들 직접 만드니까 똑같은 가방이 하나도 없어요.

베낭에서 끝나지 않고 앞치마까지 만들어라 해서 온갖 불평불만 쏟으며 만들었는데

그때 한번 만들어 둔 걸 가지고 아이들이 집에서도 너무 잘 쓰네요.

소꼽놀이할 때도 장난감 부엌에 걸어놓고 쓰고 큰아이는 유치원 졸업하고도 오랫동안 썼는데

신기한게 몇 년동안 빨아 또 쓰고 해도 아직도 깨끗해요. 얼마나 경제적인지요-

한동안 이런 천가방 만드는 재미에 여러 개 만들어

도서관 갈 때 그림책 가방으로도 쓰고

둘째 아기 때 기저귀 가방으로도 쓰고

다용도로 아주 편하게 잘 썼지요.

가끔은 재주가 많은 엄마가 있어 흉내낼 수 없을 만큼 근사한 가방을 아이에게 들려주어

많은 엄마들의 부러움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이런 소박한 것으로 은근히 경쟁하는 일본 엄마들이 귀여워보이던데요^^

 

이곳 유치원에선 내일이 내년 입학 원서접수날이거든요.

원서를 내고 아이랑 새 유치원에서 쓸 가방의 천을 구경하러 가는 엄마들..

아이가 좋아하는 천을 고르고 거기에 한땀한땀 정성을 다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 이 아날로그적인 육아 환경이 저는 싫지가 않네요.

큰아이가 유치원 때 쓰던 물건이 담긴 상자에는 그때 제가 밤늦도록

거북이같은 속도로 미싱을 돌려 만들었던 천가방들이 아직 있어요.

그 가방들에 처음 아이를 집단 속에 보내며 겪었던 온갖 추억들이 다 담겨있는 거 같아

볼 때마다 훌쩍이게 되네요..

 

이제는 너무 작아진 큰아이의 앞치마도 슬슬 새로 만들어줘야 할텐데.

이번 주말에 같이 천가게에 구경하러 갈까 해요. 여행을 할 때보다 준비할 때 더 즐거운 것처럼

만들기 전에 다양하고 이쁜 천을 구경할 때가 젤 두근거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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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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