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시작한 지, 15년 쯤 지나고 나니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제 더 뭐가 있을까'
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엌육아, 그림책육아, 공동부엌육아, 텃밭육아, 어린이식당 ...
참 유난스럽기도 한 육아경력을 거치고 나니,
이제 더 뭐가 있을까, 있을 수는 있을까?,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해도 내가 감당할 체력과 의욕이 남아있을까..?
이젠 좀 큰 일 벌이지 말고,
새로운 일 벌이지 말고
조용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맘 먹은지 3일도 되지 않아,
텃밭농사 대표를 맡고 있는 선배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영희씨, 논을 무료로 빌려주는 곳이 있다네.
우리 벼농사 지어볼까??"
... ...
지난 3월 쯤에 이런 연락을 받은 뒤,
논농사 왕초보들이 허둥지둥 모내기 준비를 시작하고
어찌어찌하다보니,
6월이 된 지금은 주말마다 논으로 출근하듯 하며 살고 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일인데
누구보다 행복해하고 신이 난 딱 한 사람이 있다.
초등3학년 우리 아들.
물이 가득한 논에 래쉬가드까지 착용하고 온 몸을 던져 노는 아들..
0-12세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시작한 이번 벼농사.
평생 농업을 해 오신 분들이 점점 고령화되면서
대도시 근교에는 논을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사례가 많아졌다.
텃밭 농사를 몇 년간 경험한 우리들은
언젠가는 논농사도 지어보면 좋겠다.. 막연하게 말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예기치도 못한 시기에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텃밭농사 대표분이 일단 농업을 하시는 분들 도움을 받아가며
기본을 배워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해 주시는데
말로 듣는 설명보다, 몸으로 직접 익히는게 더 빠른 것 같았다.
오밀조밀한 텃밭만 보다, 물이 가득 담긴 논을 보니
그 광활함이란.. 시원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한데
이게 다 우리 일이라 생각하니, 멘붕;;
그런 부모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아이들.
아이들은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없이 논을 둘러싼 자연 전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였다.
밭도 너무 좋았지만, 논은 좀 더 다이나믹하고 스펙타클..??
여기저기 살아뛰노는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에
쉴 새없이 함성과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모내기 하는 날은 그야말로 머드 축제장 같았다.
한 쪽에서는 어른들이 모내기를 하고, 아이들은 모내기를 돕다가도
반대쪽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개구리, 올챙이들이랑 놀며
발이 푹푹 빠지는 논을 온 몸으로 만끽했다.
그러다 들려오는 한마디들,
"엄마, 논 위는 따뜻한데 속은 차가워요."
"개구리가 우리가 잡으려고 하면 죽은 척 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렇게 몸을 쓰고 나니,
11시만 되어도 배가 너무 고프다.
이 날은 한 엄마가 찐빵을 참 많이도 사 왔는데
따끈한 찐빵이랑 보리차.
어린 아이들도 2개씩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우리 아들은 도대체 몇 개를 먹었는지 ..
이렇게 먹고도 오후 1시가 되어 준비해간 주먹밥을 몇 개나 먹었으니
정말 잘 안 먹는 아이가 있다면, 텃밭이나 논에 데려가 보세요..^^
모가 제대로 심어지지 않은 곳은 하나하나
직접 우리가 손으로 일일이 심었다.
이걸 다 끝내고 나니, 허벅지 뒤쪽 근육이 당겨서 많이 아팠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썼다는 실감과 정말 내 손과 발이 해냈다는 뿌듯함이
고되기만 할 거란 걱정을 거뜬히 이기고도 남았다.
벼농사를 지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이
왜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도울 수 있었는지,
왜 논일을 하면서 노동요가 필요했는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체험하고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몸이 힘들긴 한데
뭐랄까. 논에 갈 때마다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나한테 왜 이러세요' 싶었던 농사가
한 번씩 갈 때마다 조금씩 알게 되고, 몸도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논일에도 중독성이 있는 걸까?
저녁 무렵,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논둑에 서 있으면
뭔가 뭉클한 기분이 된다.
어리고 여려 보였던 벼의 아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다니러 갈 때마다 또 자라있는 걸 보면 너무 대견하고 이쁘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워지기 시작하면, 돌보는 게 쉽지 않겠지만
친구들과 함께니까 서로 도우며 즐겁게 해 보고 싶다.
가을에 벼를 수확할 생각을 하면 정말 꿈만 같다.
육아 15년만에
내가 스스로 키운 무농약 쌀로 밥을 지어먹을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부엌에서 텃밭으로 나온 육아, 그리고 어린이식당에서 논까지
아주 예전에 유행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책 제목이 생각난다.
논농사 다음엔 또 뭐가 있을까.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해도, 아직 꿈꾸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인가.
부엌육아도 텃밭육아, 어린이식당도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간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직접 참여하든 하지 않든,
이 논농사 다음에 이어질 육아실험들을 꾸준히 이어갈
후배 엄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끌리는 것의 공통분모를 찾아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한번 찾아가 보시길..
그 길이 바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비법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