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룩 쩝쩝. "국물이 끝내줘요" 라면을 광고하는 연예인. 저 연예인은 집에 라면 떨어질 걱정은 없겠다, TV 속 광고를 보며 광고 속 모델이 부러웠다. 광고 모델 집에는 광고한 제품이 넘쳐날 거라는 상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광고하는 제품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제품인 것처럼 홍보를 하는데, 설사 광고하는 제품이 자동차라도 자동차 한 대 정도는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국물이 끝내주는 라면, 빨래 끝이라며 미소를 안겨주는 세제, 심지어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음료수까지. CF 모델 친구가 주변에 있다면 적어도 해당 제품을 사는데 할인을 받을 수도 있을 거란 상상도 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결코. 내 앞에 놓인 책 스무 권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두 번째 책을 내고 출판사에서는 내게 스무 권의 책을 배송해 주었다. 책을 쓴 저자인데 나에게 무료로 주는 책은 단 스무 권. 지인들에게 스무 권의 책을 주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내 책이라도 직접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책이 나오는 과정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스무 권의 책을 그냥 받는 것도 고맙긴 한 일이다. 책을 처음 읽는 독자의 역할을 하는 출판사는 내용과 구성에 대한 의견부터 디자인 편집 그리고 판매에 이르기까지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니까. 라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연구진부터 디자인 제조과정까지 적잖은 노력을 생각을 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라면 하나도 아까울 것 같았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2.jpg

(사진 : 픽사베이)
 

스무 명. 집에 책 스무 권이 도착한 날, 스무 권의 책은 더 이상 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줄까? 아무런 대가없이 그저 고마움의 표시로 책을 주고 싶은 사람, 스무 명. 하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생각이 나는 대로 이름을 적어 보자. 일단 부모님. 책을 드리지 않았을 때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어머니는 때론 생각의 속도보다 말씀의 속도가 더 빠르다 는 걸 기억했다. 책을 가장 먼저 드리지 않는다면, 먼저 "야 이놈아"란 소리부터 나오지 않으실까. 부모님께 감사의 글을 올렸다. 그 다음으로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 아이가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고 나서 내 책을 위에 뚜껑 위에 덮은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에게 내 책은 그저 냄비 받침대나 라면 뚜껑을 덮기 위한 용도로 쓰일 것 같았다. 아이는 패스.


변이*, 안*춘, 이상*, 김*욱, 김*수… 하얀 종이에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이름을 적다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놔. 한결  같이 대부분 남성이며 존경하는 기자였지만, 가정보다는 일에 더 집중을 하거나 혹은 솔로였다. 이들이 내 주변에 있는 이상 나에게 결혼이나 연애는 먼 나라 이야기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고마웠다. 같이 있어줬으니까. 회사를 그만 두고 나면 하나의 슬픈 축복이 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준다는 슬픈 축복. 내 이름 앞에 붙는 ‘기자’란 수식어가 없어도 기자 뒤에 있는 이름 석자를 보며 전화를 걸어 준 사람들. 경찰대 출신인 한 간부인 친구 말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퇴직한 경찰이 서글픈 이유.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만 제복을 벗고 옷걸이만 남고 나니, 사람들은 제복이 걸린 다른 옷걸이를 찾아가기 때문이라고. 조용한 내 휴대폰을 볼 때면 그 말이 이해가 갔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하루에 셀 수 없이 울리던 전화가 조용하게 무척 낯설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jpg

(사진 : 픽사 베이) 

 

책을 펼치고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감사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글로 표현을 하면 말로 표현을 할 때보다 더 오래 상대에게 머문다. 힘든 시간 같이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전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고민을 들어준 시간에게도 감사함도 함께 표시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이 많거나(물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만) 사회적으로 출세를 해서가 아니라 힘든 시간 나의 고민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만취 상태로 선배에게 욕도 하고(물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증언에 따르면 그랬다) 때로는 책상에 엎어져 눈물도 흘리고, 삶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을 때에도,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었던 사람들.


논문이 끝나가는 올해 연말엔 그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다짐을 했다. 내가 외롭지 않았던 건 바로 그들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기로 했다. 고마웠어요, 나의 소중한 사람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수많은 인연의 끈이 우리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고 있으며 그 끈을 통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헨리 멜빌 목사, 18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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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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