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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지방으로 출장간 저녁.. 상을 물리고 세 아이를 불렀다.

"오늘 가족 모임 하자, 우리끼리.. 너희들하고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두 딸은 거실 가운데 이쁜 천을 깔고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장식을 했다.

나는 초에 불을 붙이고 아이들 사이에 앉았다.

오랜만에 고즈넉하고 따스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최근에 우리 가정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남편과 나의 부부 싸움이다.

우린 자주 싸우는 편이 아닌데 이번엔 이틀이나 갔다. 발단은 모든 부부싸움이 그러하듯

참으로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 마다 우리 부부와 아들은 아들의 학교에서 주관하는 역사 세미나에 참석한다.

당연히 두 딸도 함께 간다. 지난주엔 역사계의 귀한 원로를 모시고 의미있는 강의를 들렀다.

감명받은 바가 커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과 그 얘기를 나누는 중에 사달이 났다.

아들이 문득

"그런데 엄마는 왜 질문을 안 하셨어요?" 물은 것이다.

대답을 하려는데 남편이

"엄마는 모르니까 못 한거지" 이러는 거다.

나는 발끈해서 "그렇게 말 하지마" 했는데, 남편은

"뭘 물어봐야하는지 모르니까 안 한거잖아" 하며 웃는 것이다.

 

일어난 일은 이게 다다, 참으로 단순하고 유치한 일이다.

남편은 물론 농담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농담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나는 이런 식의 농담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날은 강의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뿌듯하게 차 오른 상태였다.

그런 강의에 대해 아이들과 나누는 사이에 그런 농담을 한 것이 더 기분 상하게 한 것이다.

나는 화가 나서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냥 농담일뿐이었다고 남편이 사과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남편은

자신의 농담에 정색을 하는 마누라때문에 화가 나 버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올려버리는 것이다.

차 안은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가득차고 나는 이번에 이런 행동때문에 또 화가 났다.

볼륨을 줄여달라고 하니 남편은 격앙된 얼굴로 조금 줄인다.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다툼으로 감정의 도미노가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자존심이 건드려진다.  자기의 권위에 도전을 느낀다.

이젠 그동안 이런 저런 참고 있던 감정들이 뭉글뭉글 되살아난다.

애초에 뭣 때문에 싸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감정의 도미노는 차례로 다른 것들을

건드려 마침내 창대하고 엄청난 덩어리가 되 버렸다.

 

집에 와서 나는 조곤조곤 내 감정을 얘기하고 사과를 했으나

사과하면서 꺼낸 말들이 신혼시절 남편이 시댁에서 나를 대상으로 농담했던

일들로 돌아가는 바람에 상황이 더 안 좋아져 버렸다.

남편의 농담이 농담으로 가볍게 들리지 않는 역사는 내게 이렇게 깊은 것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꺼낸 이야기들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다.

남편은 "듣기싫어!" 하며 이미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거칠게 대꾸하고 아들방에서 잤다.

그 다음날에도 남편은 내게 말도 안 붙이고 내가 차려주는 밥도 거부하고 종일

몸에서 분노만 뿜어내고 있었다. 그 날은 내가 딸들방에서 잤다.

일요일은 남편 모교 행사가 있어 가족 모두 참여했다. 종일 비가 왔고

나는 몸이 안 좋았고 내내 차에만 있어야 했다. 저녁에서야 남편은 내게 말을 붙였다.

얼굴도 풀어져 있었다.

그날 밤, 남편은 딸애를 시켜 같이 자자는 말을 건넸고, 월요일이 되어서야 우린

카톡으로 그간의 감정들을 나누며 화해를 했다.

그리고 남편은 화요일 아침에 지방 출장을 간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오면서 내내 생각을 했다.

엄마 아빠의 모습을 아이들은 어떻게 봤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회복적 정의'를 하면서 배웠던 '가족 서클' 모임을 하게 된 것이다.

 

촛불앞에 둘러 앉아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 주 금요일밤, 역사공부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 아빠가 싸웠잖아.

그리고 주말 내내 서로 말도 잘 안하고... 물론 지금은 화해하긴 했지만 엄마 아빠 모습을

너희들도 다 봤잖아. 그래서 궁금했어. 엄마 아빠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뭘 느꼈는지...

엄마 아빠도 더 좋은 부모가 되려면 너희들한테 계속 배워야 하거든... 솔직하게

느끼고 생각한 것을 얘기해 줄래?"

 

제일먼저 이야기를 한 것은 열살 큰 딸이었다.

"저는 요... 사실...." 이 말만 꺼내고도 딸은 눈물을 글썽였다.

".... 무서웠어요."

"그래... 무서웠구나"

".... 네... 엄마 아빠가 싸우고 아빠가 막 무서운 표정 짓고 하니까... 그러다가...

엄마, 아빠가 이혼이라도 하면 어쩌나... 생각들고....

너무 무서웠어요"

 

아... 마음속으로 찬 바람이 지나갔다.

 

".. 그래... 엄마 아빠가 싸우면 무섭지. 무서운 생각도 들고... 힘들었겠다."

"아주 솔직하게 , 정말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요?" 아들이 물었다.

"그럼, 그게 훨씬 좋지. 솔직하게 말해줘"

"전요, 솔직히... 한심했어요. "

".. 그랬구나. 어떤 점이 한심했어?"

" 완전 농담한건데 그것땜에 크게 싸운 것도 그렇구요. 엄마 아빠가 나한테 가르쳐준대로

두 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도 그렇구요. 저한테는요, 바로 사과하라면서 엄마 아빠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화를 오래 품고 있는거 아니라면서요."

"그랬네... 그럼.. 어떻게 했어야 됐을까?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그냥 농담이었다 하고 바로 사과하죠. "

 

"저는요... 저도 무서웠어요." 일곱살 막내가 말을 했다.

"아빠가 말도 안 하고, 무서운 표정하고... 엄마가 사과하려고 하는데 받아주지도 않고...

그래서 슬펐어요"

"그래... 무섭고 슬프지.. 그런 모습 보면....

그러면 얘들아.. 정말 화나고 기분 나쁠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처럼 말 안하고, 밥도 안 먹고

무서운 표정 짓는거 말고..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엄마는 아빠가 갑자기 시동 걸고 차 타고

나가는 것도 정말 싫었거든"

"바람쐬러 가는거죠. 기분 안 좋으니까... 저도 아빠랑 싸웠을때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잖아요"

아들이 씩 웃었다.

" 어디가서 뭘 했는데?"

"저수지 근처에 가서 침도 뱉고, 소리도 좀 지르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왔죠."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차 타고 나가면 걱정되지 않을까? 엄마는 마음이 안 편한데...윤정아, 너는 그런 모습 어때?"

"저는 그것도 무서워요. 아빠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차 타고 가버리니까요.."

"그럼, 정말 화 나고 기분 나쁠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음.... 저라면요..."

 

열살 딸 아이가 말했다.

 

"기분 안 좋으니까 방에 들어가 혼자 있으면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 까지 있다 나올래요"

"그런데 기분 안 좋다고 그냥 문 닫고 들어가버리면, 만약 부모가 그렇게 행동하면

아이들이 볼때 무섭거나 두렵지 않을까? 지금 부모의 상태나 감정을 조금 더 잘

전달해주면 좋을것 같은데..."

"그러면요..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혼자 있고 싶으니까 방에 들어가 혼자 있는 동안

기다려달라고 말 하고 들어갈래요."

"아... 그러면 되겠다. 그러면 지켜보는 가족들도 아이들도 걱정 안 하고, 엄마나 아빠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잘 기다릴 수 있겠다."

 

"저는 '싸움'이란 동시를 지었어요.

음.... 액체 괴물처럼... 촛불처럼... 싸움도 흘러내리네. 눈물처럼 흘러내리네.."

뜬금없는 막내의 동시 낭독에 심각했던 우리 세 사람은 깔깔 웃어 버렸다.

 

"아, 감동적이다. 잊지 않을께...아빠는 마음이나 기분이나 감정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말로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을 제대로 배우신 적이 없대. 그래서 지금도 그게 제일 힘들대. 그래서 그냥 말로

미안하다 하면 되는것을 다른 식으로 해 버리는 거야. 마음속으로는 말을 해야지.. 하는데

행동으로 안 나오니까 아빠도 얼마나 힘들겠어. 엄마가 그런 아빠 마음 다 아니까 잘 이해해주면 되는데 엄마도 속이 좁아서 가끔 그게 잘 안되고 그래. 그러다가 이번 처럼 이렇게 오래 싸우게 되고, 너희들도 힘들게 하고 그랬어. 정말 미안해. 오늘 너희가 솔직하고 아주 좋은 말들, 정말 엄마 아빠가 배울만한 귀한 말들 많이 해줘저 정말 고마워. 너희들이 한 얘기들은 아빠랑 잘 나눌께.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이 세 마디의 말을 잘 하고 살아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좋아진대,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 마디를 자주, 잘 해주자. 서로서로한테..."

 

가족 모임은 이렇게 끝났다. 아이들은 촛불을 가지고 한동안 장난을 치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라고, 어른이라고 늘 성숙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숙하고, 서툴고,

엉망이고, 못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 눈에도 그런 모든 모습들이 고스란히 보인다. 그리고 아이들도 그 나름대로

부모의 행동을 판단하고 생각한다. 그 속에 어른들이 배워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사소한 싸움에도 이혼을 연상할만큼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어른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모습을 보며

감동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좀 더 자주, 아이들이 들려주는 지혜에 귀를 귀울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부부싸움은 부부간에 쌓아온 감정의 역사를 건드린다.

그래서 사소한 계기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들로 펼쳐지기 마련이다.

생활은 나누지만 감정을 나누는데 소홀했던 우리 부부 역시 매번 어리석은

시행착오들을 겪고 만다.

살아가는 내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리라.

아이들 에게 좀 더 자주 지혜를 구하며 조금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애쓸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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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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