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4.jpg

 

처음엔 막내였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수두가 퍼지고 있었는데 막내가 속해있는 1학년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나왔다. 반에서 절반 정도의 아이들이 수두로 결석을 하다가

차츰 진정되는 가 했는데 덜컥 이룸이가 수두에 걸렸다.

같은 날 큰 아이는 감기 증세로 조퇴를 하고 왔다.

하루 지나고 났더니 이룸이는 온 몸이 수포로 덮였고, 큰 아이는 B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 윤정이 몸에서도 수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생한테 수두가

옮겨온 것이다.

 

혁신학교 8년차에 큰 평가를 앞둔 학교에서는  행사가 많았고 내가 맡은

역할도 있어서 아픈 아이들을 집에 두고 널을 뛰듯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들어왔더니

세 아이 모두 엄마만 찾는다.

첫 아이와 막내는 고열로, 둘째는 두통과 목 통증을 호소하며 울상이다.

잠시 나도 울고 싶었다.

 

어릴때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아픈 일이 많았다. 그 시절에 쓴 글들을 보면

어린 세 아이들 한번에 돌보느라 애달프게 고단했던 내 모습이 보인다.

병원과 약에 의지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은 내내 건강했다.

열나고, 배탈나고, 아파도 약 없이 며칠 앓으면 거뜬히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아이들이 아픈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병원에 들른것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아이들은

잘 커 주었는데 이번에 덜컥 한꺼번에 셋 다  아프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증세로 자기를 보살펴줄것을 쉼없이 요구한다.

수두로 애쓰는 동생들에게 큰 아이의 독감이 옮겨갈까봐 노심초사하며

나 또한 전염으로부터 조심하느라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 아픈 얘기를 이웃들에게 전하니 모두가 한 목소리로 염려해주고

신경을 써 준다. 세 아이 돌봐야 하는 내 걱정을 해주는 엄마들도 많았다.

건강에 대해 오래 공부해 온 소중한 이웃 하나는 긴 전화 통화에서

우선 아이들 먹거리를 간소화 하고, 밀가루와 생선, 육류와 설탕같은 부담되는 음식을

삼가하고 무엇보다 좋은 곡식으로 지은 밥을 천천히 씹어 먹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쌀의 영양은 갓 도정했을 때가 가장 높다며 집에 그런 쌀이 있으니

가져가서 애들 밥 해 먹이라고 하는 것이다.

 

밥.jpg

 

봉지에 담겨진 쌀은 따스했다.

이렇게 귀한 쌀이라니..

생협에서 유기농 쌀을 주문받아 먹고 있었지만 금방 도정한 쌀은 아닐 것이다.

쌀이 주식인 민족으로서 늘 밥의 중요성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현대 생활에서

갓 지은 밥으로 상을 차리는 일은 점 점 더 어렵고 귀찮은 일이 된 것이 사실이다.

먹거리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때 그때 밥을 지어 먹는 일엔 소홀했다.

전기밥솥이 싫어 여전히 압력솥을 쓰다보니 하루에 한번 넉넉히 해 놓은 밥을

다시 쪄서 먹어 왔었는데 귀한 쌀을 받고 보니 마음이 뭉클 해졌다.

그래... 밥이 가장 중요한데..

그 귀한 일에 내가 오래 소홀했었구나..

 

얻어온 귀한 쌀로 밥을 앉혔다.

쌀 씻은 물도 된장국을 끓이려고 잘 받아두고 불려둔 현미와 섞어 압력솥에

올렸다. 잠시 후 쌀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밥 2.jpg

 

갓 지은 밥의 그 한없이 구수한 냄새..

늘 무심하게 여겨왔던 밥 냄새가 이렇게 눈물겨울 수 없다.

한 숟갈 떠서 입안에 넣었더니 밥알 하나하나가 탱글탱글 살아서 터진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밥 3.jpg

 

입맛이 없다고, 밥 먹기 싫다고 투정부리던 아이들이 밥 냄새에 이끌려 상에 앉는다.

어디서 어떻게 온 쌀인지, 어떻게 지어진 밥인지 들어가면서 아이들은 상에

수굿하게 앉아 밥을 떠 넣는다.

갓 지은 밥과 된장국 한 그릇.

"맛있어요.."

밤 새 힘들어 하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에 눈물이 왈칵 나올 뻔 했다.

 

그래, 그래..

먹어줘서 고맙다. 밥 맛을 알아주니 더 고맙다.

 

몸을 낫게 하는 것은 결코 약일 수 없다.

아이들 몸을 이루고 채우는 음식이 가장 중요한 약일것이다.

좋은 음식, 정성이 들어간 음식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일..

다시 마음에 새기고 있다.

 

나도 한 그릇 먹었다.

오래 오래 씹어서 쌀의 단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그 쌀에 담겨서 내게로 온 그이의 마음과 관심도 같이 먹었다.

배 부르다. 눈물겹게 충만하다.

오래 허기졌던 영혼까지 꽉 채우는 진한 밥 이었다.

 

귀한 밥 먹고 다시 힘 내자.

잘 아프고 일어나서 다가오는 좋은 계절을 누려야지, 얘들아.

살아가는 내내 우리도 누군가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일, 잊지않으면서..

 

힘 난다.

밥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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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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