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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덟살이 된 막내가 무엇보다 기다렸던 것은 초등학교 입학이 아닌

'어린이 교통카드'였다.

그동안 전철을 탈때마다 언니나 오빠, 혹은 엄마의 전철표에 의지해서 개찰구를

통과하던 굴욕과 불편에서 해방된 것이다.

유치원생까지는 전철이 무료고, 초등학생부터 요금을 내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입학도 안 했고, 무엇보다 생일도 안 지났는데 기어이 새해가 되었으므로 여덟살이 되었으므로

당장 교통카드를 가져야 한다는 막내의 주장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도 성화를 부려서 집 근처 편의점에서 교통카드를 사주려고 했더니 제 맘에 드는 카드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꽤 여러곳의 편의점을 돌면서 교통카드의 디자인을

보고 다녀야 했다. 그 동안은 1회권을 사서 썼다.

결국 모처럼 찾아갔던 대학로의 한 편의점에서 막내는 맘에 드는 교통카드를 찾았고

주민등록번호로 등록한 후 제 품에 가지게 되었을때 세상을 다 얻은것 처럼 행복해 했다.

덕분에 나는 누군가가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표를 가지고

개찰구를 통과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는 것이 다 궁핍하고 어려웠던 내 어린시절에 공공요금이란 되도록 덜 내고, 늦도록 안 내는

것이 중요했지, 제 나이가 되었다고 요금을 챙기는 어른은 드믈었다.

왜 그렇게 여물지 못하냐고, 언제 철드냐고 애들을 닥달하던 어른들도 목욕탕에 갈 때는

되도록 어린 표정을 지으라는 등, 너는 지금부터 여섯살이라는 등 이런 소리들로 애들

입을 꽉 틀어 막곤 했다.

때로는 공공요금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키가 더디 자라는 애들이 이쁨 받을 때도

있었다. 뭐든지 아껴야 하는 그 시절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이의 위치나

나이에 맞는 적절한 책임과 공적 권리따윈 관심 밖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대충 어지간히들 살게 된 요즘에도 공공요금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깝고, 조금 덜 내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있다. 멀쩡히 있다가 나이에 따른

요금제 앞에서는 아이 나이를 한두 살 깎아 내리면서 요행을 바라는 부모들도 가끔 본다.

그럴때 아이들은 어떤 기분일까.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기도 할 것이다.

요행이 그냥 통과라도 하면 다행이다 안심도 하겠지만, 아.. 이렇게 속일 수 도 있구나..

어른들은 이렇게 사는 구나.. 안 들키면 되는 구나...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이런 부모 밑에서 아이는 정직이라던가, 당당함이라던가, 시민으로서의 의무같은 것을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어른들은 돈 몇 푼 아끼겠지만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알게 하기도 전에 요행과 꼼수를 가르치게 되는 꼴이다.

 

생일도 발육도 빠른 막내는 외출을 해서 전철을 탈 때마다 자기는 표가 없다는 것을 오래

억울해 하고 속상해 했다. 어리기 때문에 무료라는 것은 전혀 기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표가 있는데 저만 없어서 누군가의 표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보호자와 유아가 함께 통과하는 넓은 개찰구가 있는 곳은 덜 했지만

한 사람씩 통과하는 곳에서는 몸을 숙이고 기어서 지나가야 했다. 그럴때마다 몹시 부끄러워했다.

자의식이 예민하던 둘째도 막내 나이 무렵에 전철을 탈때마다 긴 개찰구를 표 하나로 통과하게 되면

자기가 지나기 전에 덜컥 하고 표 안내는 사람을 단속하기 위한 문이 닫힐까봐 오래 마음을 졸이곤 했다.

그때는 그런 마음을 자세히 헤아리지 못했는데 막내를 지켜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어리기 때문에 보호받고, 요금을 면제받 다는 것을 당당하게 느끼고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더 배려해야 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그냥 어른들에게 묻어서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굴욕적으로 몸을 숙이고 기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 통과할 수 있는 전용 개찰구를 만들어 주고, 그 개찰구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더 신경을 써 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이가 통과하는 넓은 개찰구는 수시로 닫혀 있거나

인터폰을 눌러 직원과 통화해야 열리는 일이 흔하다.

당당하게 이용하기에는 많이 불편하고, 당연한 배려인데도 사정을 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때도 있다.

미래 시민이 될 아이들을 사회가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는지가 그 사회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갈이 멀다.

 물론 어른과 부모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냥 너는 어리니까 무료야... 라고 말해주기 보다, 왜 어린 사람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는지에 대해

더 세심하게 전달해주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이룸이 2.jpg

 

자기 표가 생기고 처음으로 전철을 타게 되었을때 개찰구에 제 교통카드를 당당하게

올려 놓는 막내의 표정은 뿌듯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도 이제 어린이가 되었구나, 내 몫의 요금을 지불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왠지 성큼 큰 것 같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모양이다.

 

주민등록증을 처음으로 발급 받았을때,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게 되었을때, 내 명의의

신용카드를 얻고, 내 명의의 핸드폰을 쥐게 되었을때 그때마다 내 세상도 한 단계씩

넓어 졌을 것이다. 하나의 증명과 상징이 가져다 주는 그 무수한 변화와 권리와 자유들에

정신없이 취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하나의 권리에는 수많은 책임이 따른 다는 것을 말이다.

권리를 얻는 것 보다 그 권리가 주는 자유와 책임과 문제들에 대해서 충분히 알려주는

어른들은 없었다. 사회도 그랬다.

그래서 적지않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교통카드를 쓰게 되고, 내 신용카드나 핸드폰이 생기는 것 보다

그것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잘 써야 할지 배우고 익히는 일일텐데 말이다.

 

이룸이는 교통카드를 제 스스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현금과 같아서 잃어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을 누누히 얘기했지만 기어이

제 지갑안에 챙겨 넣었다. 지나다 보면 둔 곳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완전히 분실하기도 할 것이다.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나왔다가 개찰구 입구에서

낭패를 겪는 일도 있으리라. 탈때마다 잔액이 충분한지 점검해보는

습관도 가져야 하겠다.

작은 카드 한장으로 많은 일들이 막내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기쁘게 설레는 마음으로 막내는 그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란다는 것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일이지만, 감당해야 할 몫들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과정을 어른들이, 부모들이, 먼저 시작한 형제들이 차근차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제 역할과 도리를 다 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겨울방학은 끝났지만 유치원 졸업후 입학전까지 남는 시간동안 막내와 전철여행을

자주 다녀야겠다. 교통카드 한장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근사한 곳들을 떠올려보는 중이다.

세 아이 모두 자기만의 교통카드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이 역시 부모로서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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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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