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거듭하며 다시 가게 되는 곳이 있다.
내겐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이 그렇다.
시댁인 강릉을 지나는 길목에 있기도 하지만, 나무와 물을 좋아하는 내게
월정사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기에 몇 번을 가도 여전히 좋다.
결혼 첫 해 처음으로 추석을 시댁에서 보내면서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아직 아이가 없던 내게 한창 장난이 심한 조카들은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으며 처음 맞이하는 시댁의 명절은 힘들고
어렵기만 했다. 남편이라도 살갑게 내 사정을 살펴주고 보듬어 주었다면
덜 했을텐데, 늦장가 들어 마누라와 찾은 첫 명절에 남편은 저 혼자
편하기만 하고 아내의 마음을 읽어 줄 줄 몰랐다.
마음속에 속상함과 야속함이 꾹꾹 차 올랐고, 어렵게 어렵게
둘이서 잠시 월정사에 다녀오겠다고 허락을 받아 길을 나섰다.
그리고 월정사 계곡에 서서 나는 펑펑 울어 버렸다.
시댁도 어렵고, 남편은 야속하고, 결혼이란게 이렇게 힘든건가 싶어
새삼 서러웠던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눈물에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월정사 계곡 맑은 물에 속상했던 마음을 흘려보내고
천년 전나무 숲길의 푸른 기운을 채워 다시 시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일까.
강릉 시댁을 오갈때 늘 오대산 월정사 근처를 지날때면 그리웠다.
지난주에 모처럼 시댁에 다녀왔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세 며느리가 번갈아 가며 아버님을 보살펴 드리고 있는데
이번엔 내가 다녀올 차례였다.
아버님 드실 음식을 장만해 놓고, 집안 정리도 해 놓고, 어머님 계신 산에도 다녀오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오랜만에 월정사에 들리자고 했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변함없이 푸르렀다.
2006년, 네 살인 필규와 이 길을 걸었었다.
서툰 며느리 노릇에 비로소 편해질 무렵, 신혼 때 눈물을 흘렸던
그 길을 명랑한 네살 아이와 행복하게 걷던 기억이 난다.
2009년엔 세살인 윤정이와 처음으로 이 길을 함께 걸었다.
일곱살 오빠 손을 잡고 윤정이는 신이 나서 오빠 걸음을 흉내 내며 성큼성큼 걸었다.
두 아이의 뒷 모습이 너무나 이뻐서 가슴이 다 뭉클했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일곱살 아이는 열두 살 사내아이로 자라 있었고, 세살 여동생은 여덟살의 의젓한
언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손을 꼭 잡고 두 아이는 짙은 녹음속을 걸었다.
아이들의 5년이란 얼마나 엄청난 시간인지,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새삼 지나간 사진을 들여다보며 놀라게 된다.
형님도, 동서도 서먹하고, 시댁의 명정 풍습이 낮설고 어렵기만 하던
서툰 며느리와, 좀처럼 표현이 없고 마누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서툴던 남편은
이제 말없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
둘다 흰 머리는 많이 늘었지만 표정은 많이 닮아있음을 알겠다.
그동안 세 아이 낳고 기르면서 무던히도 싸우고, 화내고, 오해하고, 서운해 하면서도
우린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와지고 있던 것이다.
둘만 있던 풍경속에 첫 아이가 스며들고, 다시 둘째 아이가 들어오고
그리고 셋쩨까지 더해지면서 이제 다섯이란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 세월이 꼭 12년이다.
우리만 걷던 길을 세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하나의 풍경을 이루며 뛰어 간다.
계곡물은 변함없이 맑고 깊은데, 전나무 숲도 여전히 짙고 푸른데
이 풍경을 채우는 우리의 모습은 매번 다르고 또 새로운것이
고맙고 고맙고 ... 고맙다.
아이들은 계곡에서 옷을 적셔가며 즐겁게 놀았고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많이 웃었다.
이다음에 올때는 또 성큼 자라있으리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커서 우리곁을 떠난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남편과 단 둘이 이 길을 걷기도 할 것이다.
변함없는 풍경이겠지만 우린 이 풍경속에 새겨있는
우리들의 많은 이야기를 다시 길어올리며 즐겁게 걸을것이다.
내 아이들이 전나무처럼 푸르고 곧게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남편도 변함없이 아이들에게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자고
하늘을 가리며 우뚝 솟아있는 푸른 나무들을 보며 다짐하고 돌아왔다.
우리의 추억이 담뿍 담겨 있는 그 길..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