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사과.jpg

 

이틀내 내리던 비가 그쳤다.

몇주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 마치 딴 세상 같다.

물 오른 나무들, 꽃들이 온통 환하다.

환한 세상에서 슬픔은 한층 더 선명하다.

 

어제 큰 아이는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안산에 새로 마련된 합동 분향소에

다녀왔다. 전날 제 옷장을 뒤져 미리 챙겨놓은 검정 바지와 검정 웃옷을 입고

아이는 집을 나섰다.

저녁에 다시 만난 아이에게 분향소에 다녀온 이야기를 물으니

'사진속에 형과 누나들이 정말 환하더라요' 한다. 그래.. 그래.. 열일곱 아이들이

얼마나 환한 목숨들이었겠니..

그 젊은, 그 웃음, 그 얼굴, 얼굴들..

그래서 더 사무치는 슬픔이란다.

 

심리학에 '애도의 기간'이라는 용어가 있다.

가슴아픈 상실을 경험했을때 슬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기간'을 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충분히 그 상실을 느끼고, 아파해야 한다는 점이다.

'애도의 기간'은 혼자 보내는 것 보다 아픔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더 좋다. 내 아픔과 상처가 공감을 얻을 때 상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다.

크나큰 상실을 경험했는데도 슬픔을 인정하지 않고, 안 슬픈 것 처럼

괜찮은 것 처럼 자신을 속이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슬픔은 아픔이지만 커다란 분노다. 이런 일이 일어난 운명에 대한 분노, 세상에 대한

분노다. 이런 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나누지 않고 묻어버리면 묻혀버린

감정들은 어느날 불쑥 존재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울지 않는 사람,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더 위험한 이유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 국민적인 애도의 감정이 흐르고 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들이 커다란 슬픔과 아픔과 분노를

공감하고 있다. 이런 애도의 물결은 사람들을 분향소로 이끌고, 자신의 동네에서

촛불 모임을 열고, 자신의 옷에, 자동차에 노란 리본을 달게 한다. 어느때보다

신문과 뉴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둘 셋만 모여도 온통 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

엄청난 슬픔이고 엄청난 분노다.

세월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과 이러한 비극을 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다.

거대한 애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살피고, 허술하게 만들어진 제도에 새삼 놀라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상실은 아프고 힘들지만 길고 깊은 애도를 통해 국민들은 그 어느때보다

긴밀히 연결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언제나 국가보다 국민들이 더 슬기롭고 현명하다.  정부가 시간을 재고, 사과 시기를 저울질하고

책임을 견주며 눈치를 보는 사이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손 내밀고 아픔을 나누며

하나가 되고 있다.

 

이 거대하고 깊은 애도의 물결에 홀로 떠서 따로 존재하는 대통령을 가진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국민의 슬픔에 기꺼이 무너져 함께 눈물 흘릴 줄 모르는 그런

지도자를 보고 있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잔인한 4월이 가고 5월이 오고 있다.

슬픔은 새로운 달에도 여전할 것이다. 그래야 맞다.

우린 오래 오래 앞으로도 더 오래 애도할 것이다.

애도하면서 분노하고 그 분노의 이유를 묻고, 치유를 위한

모든 일을 시작할 것이다.

진심으로 애도하고, 진정으로 아파하고, 제대로 회복되는

이 사회를 위해 지금은 더 오래 슬퍼해야 한다.

 

단풍나무.jpg

 

주말에 세 아이들과 집 앞의 꽃사과 나무와 단풍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기로 했다.

담장이 없는 언덕위에 있는 우리집 마당의 나무들은 동네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나무들이다.

세월호에 탔던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이 일을 기억하기 위해, 이 일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새기기 위해 나뭇가지를 노란 리본으로

물들이려고 한다.

 

온 나라의 나무들에 노란 리본이 흩날렸으면 좋겠다.

모든 이의 마음이 그러하듯 고고하고 깊은 애도와

반성과 다짐의 물결이 이 세상을 다시 정화시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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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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