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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6월, 월드컵열기가 한창일때 결혼을 했다.
말레이시아의 클럽메드 리조트로 신혼여행을 가서 한국과 이탈리아 전을 열렬하게 응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남편과 아름다운 리조트의 해변가를 거닐며
'결혼 10주년때 아이들과 함께 다시 와요' 약속을 했었다. 그땐 결혼 10주년 쯤 되면 온 가족이
해외여행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세월은 흘러 흘러 2012년이 되었고 6월이 왔다. 서른셋 나이든 신부는 마흔 셋 아줌마가 되었고
열살, 여섯 살, 세살 아이를 키우고 있다. 매일 매일 세 아이와 씨름하며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어느덧 결혼 10년이 지났다. 뒤돌아보니 정말 눈깜짝 할 사이다.
매년 결혼기념일은 어떻게 지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별로 챙겨본 적이 없나보다.
그래도 10년째가 되면 조금은 특별하게 기념해야지... 하는 생각은 오래 가지고 있었다.
신혼 때 꿈 꾸었던 온 가족 해외여행은 애시당초 경제적인 이유로 고려조차 안 했지만
비행기를 타보는 것이 소원인 둘째의 열렬한 부탁이 있어 '제주도라도 가 볼까?' 생각했다.
다섯 식구가 제주도에 다녀오는것도 만만치 않은 지출이 예상되었지만 나 역시 대학 3학년
졸업여행 이후고 근 20연간 다녀오지 못한 곳이라 이번 기회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처음엔 회의적이었던 남편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말을 하루라도 끼면 숙박비와 항공비가 배 이상으로 비싸져서 남편이 평일 4일을 통째로
휴가를 냈다. 제주도에서 4년을 산 경험이 있는 서방님이 좋은 숙소를 물색해 주셨다.
저가 항공으로 예약을 하고 4일간 쓸 렌트카도 섭외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6월 11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의 꿈같은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월요일 아침 6시 30분 비행기로 출발해서 목요일 밤 8시에 돌아오는, 그야말로 4일을 꽉 채워서
제주도를 즐기는 일정이다.
여행이 확정된 것을 알았을때 어찌나 기쁘고 설레든지, 두 딸아이와 손을 잡고 마루를 빙빙
돌기도 했다.

 

이 기쁜 사실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일찍 아들 학교로 달려가 차에 태운 후 말해 주었더니
아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며칠이나 있을건데요?'
'3박 4일'
'4일이나요? 그렇게 오래 있어요?'
'2박 3일이면 몇 가지 못 봐. 일부러 4일을 잡은거야.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는 건데
좋지 않니?'
'.....'
아들은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더니
'난 가기 싫어요. 학교 가고 싶다구요.' 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제주도 가는 동안 당연히 4일간 학교를 쉬어야 하는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아들이 맞나 싶었다.


일반 학교를 다닐때는 여떻게든 학교 안 갈 궁리를 하던 아들이, 방학만 하면 드디어
학교 안 간다고 펄펄 뛰며 좋아하던 아들이 제주도 여행을 위해 4일간 학교를 빠질 수 없다며
펑펑 울다니...
정말 대안교육이 그 짧은 시간에 배움에 대한 내 아들의 자세를 이렇게 바꾸었단 말인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들의 울음은 배움에 대한 열망때문이 아니었다.
'D를 하루도 아니고 4일씩 이나 못 보는데 어떻게 가겠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내 아들은 여자친구를 4일이나 못 본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있던 것이다.
부모의 결혼 10주년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그 날을 기념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끼리
4일간이나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상관없이 여자친구과 4일간 못 만난다는 것은
절대 싫다니...

아직 애니까 그냥 한 번 그런 생각을 해 보았겠거니... 이해해주려고 했지만 아들은 진심이었다.
무려 차 안에서 30분을 울며 불며 내리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달래보고, 설명도 해 보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아들은 입을 꾹 다물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어이가 없었다.

 

열살이면 부모가 결혼해서 10년간 살아 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달을 때도 되었건만
선물은 커녕, 축하 카드 한 장 쓸 생각도 안 하는 녀석이 부모가 어렵게 마련한 가족 여행보다
여자친구가 더 소중하다고 울고 불고 생 야단이라니..

결국 어렵게 어렵게 설득을 했다.
제주도에 가서 여자친구에게 줄 근사한 선물을 골라보자고, 사주겠다고 달래고 매일 내 핸드폰으로
문자와 사진을 여자친구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녀석은 며칠씩이나 어두운 얼굴을
풀지 않았다.

아들은 돐만 지나면 옆집총각이라더니, 그렇게 엄마만 찾던 녀석도 여자친구가 생긴 후로는
내 얘기보다 여친 얘기를 더 잘 듣는다. 청소년도 아니고 이제 겨우 열살 된 녀석이 말이다.

 

흥,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제주도에 가는 것이 신나고 설렌다.
3박 4일간 세 아이들 입힐 옷이며 유모차며 챙겨야 할 짐들이 이삿짐 수준이 될 테지만 그래도 좋다.
월요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목요일엔 한 밤중에 들어오는 강행군이라도 신나기만 하다.
베이비트리 원고도 미리 써 놓고 가야하지만 그것도 좋다.


이 글이 실릴 6월 11일 월요일이면 나는 제주도에 있을 것이다.
20년 전 꽃다운 여대생으로 처음 갔던 제주도를 이젠 듬직한 남편과 꽃 같은 세 아이와 함께
가게 되었으니 내가 보낸 세월동안 나는 꽤 애쓰며 잘 살아온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다.

늘 시댁이 있는 강릉 오가는 것이 가족 여행의 전부였던 우리에겐 정말이지 처음으로 떠나는
우리만의 여행이다. 멋지고 즐겁고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어 오리라.

 

(짖궂은 우리 동네 엄마들은 '네째 만들어 오겠네'하며 웃었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을
다짐하노라.ㅋㅋ)

 

베이비트리 독자 여러분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제주도, 잘 다녀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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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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