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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사회 초년 시절.
대학교때부터 만나온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사실 저는 결혼과 육아에 굉장한 부담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나면 지금껏 누려왔던 모든 자유들을 포기해야하는 줄로만 알았거든요.
특히 출산과 육아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어요.

 
적어도 세 살까지는 엄마가 키우는 게 좋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 몇 년의 공백 이후에도 사회는 나를 받아들여줄까.
세 살까진 어떻게 키워낸다 해도 그 이후에는 누가,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고민들.
낮은 출산율이 문제라면서 제대로 된 정책은 커녕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제도권에 대한 불신.

 

한 마디로, 제대로 못할 바에야 시작부터 말자는 심정이었지요.
결혼하자마자 호주로 갔던 것도 아이를 낳기 전에, 사회에 더 구속되기 전에
하고 싶은 것(여행)을 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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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

 

그런데, 호주에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저녁이 있는 삶’, ‘가족 중심의 삶’이 현실에서 태연하게 벌어지고 있더군요.


학교와 일터로 갔던 가족들이 다같이 모여 저녁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공원이나 해변에서 신나게 뛰놉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학생들은 대학이 아닌 직업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워요.
의사나 변호사뿐만 아니라 정비공, 배관공, 농부도 전문직으로 인정해 주거든요.
상대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고요.

호주를 '심심한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이민자들이 간혹 있을 만큼

단순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졌어요.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 빛나는 캠퍼 밴이 아니어도,
낡은 자동차와 녹이 슨 보트 한 대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
저희 부부가 반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어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즐기며 사는 것.
그리고 다짐했지요.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그렇게 2년을 보내며 의기투합했건만

다시 돌아온 서울에선 여전히 막막했어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아이를 낳긴 해야 할 텐데
아이 때문에 경력단절의 위기를 겪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아예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만 키우자니 불안하고, 억울하고.
그러던 중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한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자욱하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랄까.
막상 아이를 임신하고 나자 문제점과 해결점이 분명해 지더라고요.
우리 부부는 매일 우리가 꾸리고 싶은 가정,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밑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환경은 어떤 것인가.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 있고,
동물들과 함께, 직접 가꾼 푸성귀를 먹으며 생활할 수 있는 곳.
학원이 아니라 담장 너머 이웃들과 친밀하게 교감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아이가 자기만의 속도를 스스로 찾아가며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제가 어린시절에 누렸던 것들과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 무척 닮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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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트리 신년 모임 때, 빈진향님 사진.

 

서울을 떠나자!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지자 자연스럽게 '귀촌'이 구체화되었어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즉 생존의 문제.
평범한 직장인이던 저와 남편은 기왕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
새로운 일, 하고 싶었던 일을 벌려보자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자나깨나 게임밖에 모르던 남편은 게임기획 일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고 있었고,
마침 저도 호주 여행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그럼 우리가 직접 책을 만들면 되겠다 싶었어요.
작가 인세만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힘들지만
출판사를 운영하면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계산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남편 이름으로 1인 출판사를 차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돌이 되기 한 달 전인 작년 가을 화순으로 이주한

그 해 겨울, 저와 출판사의 첫 책, 호주일주 여행기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겁도 없이, 경기도 어렵다는 출판사를 차리고 서울을 떠났다고 하면
집에 돈이 좀 있나보지?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은 모아두었던 돈과 부모님이 결혼할 때 지원해 주신 자금을
야금야금 까먹는 중이랍니다.
경제적인 면으로만 보면 결혼한 이후 지금이 가장 열악하고 불안해요.
앞으로 발간하게 될 책들은 빚을 내서 만들어야 하고 ㅎㅎ

 

하지만 우린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개와 토끼 닭을 키우며, 적게 소비하며 단순하게 사는 지금이 좋아요.

무엇보다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간다는 데 대한 만족감이 무척 크답니다.

도시 살이, 귀촌의 장단점이 있듯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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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육아.

이것이야 말로 내 인생의 통쾌한 한 방!

 

재밌는 건 귀촌도, 지금 같은 삶의 형태도 모두 아이 덕분에 이뤄졌다는 점이에요.
임신한 덕분에 쓰고 싶었던 글을 썼고, 귀촌까지 했으니까요.
결혼하고 나면, 아이를 낳고 나면,
나만의 꿈이나 이상은 더 이상 품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아이가 저도 잊고 있던 꿈을 실현시켜주는 계기가 되어준 것이지요.

 

호주의 허브 농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20대 중반에 두 아이의 엄마인 호주 백인 친구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어요.

"그런데, 왜 아이가 없는거야?"

낳기만 하면 사회가 같이 길러주는 너희들이

한국 사회에서 육아가 얼마나 전쟁인지 아느냐, 고 구구절절 설명하는게 귀찮았던 저는

"난 아직 완벽한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했지요.

그러자 돌아온 그녀의 명쾌한 답변,

"완벽한 엄마가 될 준비란 평생 불가능해! 그냥 낳고 보는거야! 그럼 되는거야!"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일기>는
여차저차하여 귀촌한지 7개월 째 들어선 저와 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출판일도, 산골에 사는 것도 여전히 우당탕탕하는 어리바리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보여드릴 수 있기를.
혹시 귀촌을 생각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초보들의 귀촌 생활을 엿보시면서 용기를 얻으셨으면.

 

그러나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아름다운 장밋빛일지, 살벌한 핏빛일지는 저도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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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숙
2012년 첫째 아이 임신, 출산과 함께 경력단절녀-프리랜서-계약직 워킹맘-전업주부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 중이다. 남편과 1인 출판사를 꾸리고 서울을 떠나 화순에 거주했던 2년 간 한겨레 베이비트리에 ‘화순댁의 산골마을 육아 일기’를 연재했다. ‘아이가 자란다 어른도 자란다’를 통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7년 겨울, 세 아이 엄마가 된다. 저서로는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이 있다.
이메일 : elisabethahn@naver.com      
블로그 : http://blog.naver.com/elisabet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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