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19.jpg

 

새로 들어간 대안학교에서 같은 학년의 여자 친구가 생긴 아들은 요즘 정말 신나게 연애중이다.
그 연애에 나도 적지않은 외조를 하고 있다.
매일 녀석을 데리러 학교에 가면 녀석은 내게 '대야미역까지 가주실 수 있죠?' 묻는다.
여자친구 D와 그 여친의 남동생을 대야미역까지 실어다 달라는 얘기다.
어깨에 잔뜩 힘주고 내게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차에 타라고 하면 녀석은 좋아서
앞자리에 여자친구와 나란히 앉는다.
덕분에 그 여자친구는 매일 마을버스를 타고 대야미역까지 가는 차비가 굳었다. 남동생까지
함께니까 적어도 하루에 천원은 버는 셈이다.
나는 학교에서 집까지 차로 5분이면 되는데 매번 대야미역까지 나갔다 다시 들어오다보니
적어도 하루에 기름값 몇 천원은 더 나가게 생겼다. 그래도 아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
군말없이 차를 전철역으로 돌리게 된다.
흥.. 벌써부터 열살짜리 아들의 연애를 이렇게 신경써야 하다니..

 

며칠전엔 그 여자친구가 처음으로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는데 우연하게 엄마들 모임이 우리집에서 있어 여자친구의 엄마도
놀러오게 되어서 수업끝난 아이들까지 우리집에서 늦도록 놀게 된 날이 있었다.
저녁밥까지 해 먹였더니 그 여자친구와 남동생은 필규네 집에서 자고 가고 싶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네 집에서 자는 일은 아들의 학교에선 아주 흔한 일이다. 대게 같은 성별끼리 어울려
자곤 하지만 필규의 여자친구 D는 같은 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 있어서 함께 자고 가면 덜 어색할
참이었다. 필규는 반색을 하며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내게 졸랐다. 크게 힘든 일은 아니어서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다. D의 엄마는 미안해 하면서도 선선히 아이들을 두고 갔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여자친구와의 1박 2일에 필규는 너무 너무 신나했다.
다행히 세 아이는 취미도 비슷해서 함께 어울려 책을 읽고 레고를 조립하며 잘 놀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필규와 여자친구 D가 함께 열광하는 영화 '해리포터'를 틀어 주었다.
필규는 혼자 누우면 꼭 맞는 소파에 여자친구와 함께 나란히 엎드려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나는 아이들이 어떤 자세로 영화를 보던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자기전에 D와 남동생에게 필규의 반팔티셔츠와 반바지를 주었다. 필규는 여자친구가 제 옷을
입고 잔다는 사실이 또한번 신나고 즐거운 듯 했다.

 

밤이 늦어 거실에 여자친구 D와 남동생이 함께 잘 이부자리를 폈다.
필규는 당연히 안방에서 나와 함께 자려니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게 와서
'엄마, D랑 같이 자도 되요?' 하는 것이다. 물론 남동생이 있으니 셋이 함께 자겠다는 뜻이다.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그러면 이불을 한 채 더 펴야겠네'했다.
'아니예요. 침낭을 가져오면 되요' 녀석은 쏜살같이 달려가서 침낭 두개를 가져왔다.
저와 D는 그 침낭을 쓰겠다는 것이다.
깔아 놓은 요 위에 필규와 여자친구가 나란히 침낭을 깔고 누웠다. 그 옆에 남동생이 누웠다.
이불만 함께 안 덮었을 뿐이지 정말 여자친구 옆에서 자는 셈이다.

필규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다른 친구 집에서 자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그렇게 좋아하는 사촌들 집에도 저 혼자 가서 잔 적이 없다. 사촌 형아들이 우리집에
놀러와 자고 갈때도 형아들과 함께 자는 법이 없었다. 잠은 꼭 남편이나 내 곁에서 잤다.
저 혼자 이모집에도 가서 자고 오고,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늘 물어보면 완강히 거절하곤 해서 더 커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친구 옆에서 자겠다니... 정말이지 녀석은 여자친구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세 아이는 늦도록 스탠드를 켜 놓은 아래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화책을 보다가 내가 불을 끄자
오래 킬킬거리고 속닥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어떻게 자고 있나 궁금했지만 자는 모습을
보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남편과 '세상에 저 녀석이 여자친구 옆에서는 냉큼 자겠다고
가버리다니... '하며 큭큭 거렸다.

 

다음날 필규는 평소엔 상상할 수 도 없는 오전 여섯시 반쯤에 저 혼자 제일먼저 일어나
내게 아침 인사를 했다. 보통은 오전 여덟시가 넘도록 자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아직도 자고 있는 여자친구 옆에서 엎드려서 책을 보는 것이었다.
늘 아침잠이 많은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보다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잠시후에 여자친구와 남동생도 깨어 났고, 세 아이는 장난치고 웃어가며 아침밥을 먹고는
마을버스를 타러 함께 집을 나섰다. 필규는 즐거운 표정으로 여자친구와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필규가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안학교의 문화가 일반 학교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보통 학교라면 3학년 남자아이가 같은 반 여자 친구를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얘기하고 누리는 것이 어렵다. 변태라는 둥, 연애한다는 둥 하며
놀리는 일이 심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남자아이 집에서 자고 가는 일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 학교에 소문이 나면 펄쩍 뛸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규 학교에선 자연스럽다. 선생님과 전교생, 그리고 그들의 부모까지 다 아는 연애는
비밀스러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그저 친구가 친구를 좋아하는 일일 뿐이다. 오히려 열살
아이들의 건강한 감정과 소통을 이쁘게 여겨주는 문화가 있다.

 

필규가 여자친구와의 일을 내게 거리낌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것엔 우리 가족의 태도도 큰 역할
을 하고 있다. 윤정이는 아직 오빠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놀리거나 비웃을 줄 모른다.
남편이나 나도 필규의 감정에 대해 놀리거나 흉을 보는 표현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친구와 무얼 하고 노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꼬치꼬치 묻는 법도
없다. 그저 필규가 얘기하는 대로 가볍게 듣고 또 가볍게 묻는 정도다.
여자친구가 놀러와서 자고 간다고 해도 그 아이들이 방에서 무슨 놀이를 하는지, 혹은 몸을
꼭 붙이고 영화를 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감출 필요가 없는 감정과 행동이란 얼마나 이쁘고 아름다운가.
열살 아이들의 연애는 어른의 것과 전혀 다르다. 어른의 상상과 생각으로 재고 의심하고
가리는 일은 아이들의 건강한 감정을 오히려 왜곡시킬 수 있다.


좋아하는데 안 그러는 척 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감추고, 옆에서 자고 싶은데 숨기는 것 보다
함께 잘 수 있다고 즐거워 하고, 나란히 누워 소근거리다가 잠드는 모습이 훨씬 더 건강하다.
나는 필규의 모습과 감정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겨우 열살 난 아이들이 서로 좋아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예상하고 염려할 필요도 없다. 곧 사춘기에 접어들텐데 하며 앞서 예상하고
걱정하는 일도 어리석다. 늘 현실보다 훨씬 앞서가는 어른의 상상이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냥 지켜보고 함께 즐거워 해주고 설레어 해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만약에 D를 계속 좋아하다가 이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어떻해요?'
아들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뭘 어떻해? 결혼하면 엄마 아빠처럼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거지.
그렇지만 아빠가 엄마랑 결혼한 것은 서른 일곱살때야. 엄마는 서른 셋이었고..
결혼이란 20년 후가 될지 30년 후가 될지 모르는 먼 미래의 일이란다. 그렇게 먼 일을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 없어. 너희들은 지금 서로 좋은 것으로 충분한거야. '
아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규도 언젠가는 내게 비밀이 생길 것이다. 여자친구와의 얘기도 감추게 될지 모른다.
그때는 또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인정해주면서 함께 가면 된다. 어떤 모습이든 아들은
계속 자라고 있는 것이고 새롭게 배우고 느끼며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다음주엔 필규가 여자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기로 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필규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저 혼자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이 된다. 그 처음이
여자친구네 집이라니... 녀석, 정말 신나겠다.

아이들은 금방 금방 자란다.
엄마랑 함께가 아니면 이모네 집에서도 자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이 어느새 저 혼자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선언하다니 말이다.


대견하다. 이쁘다.


필규는 잘 크고 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최신글

엮인글 :
http://babytree.hani.co.kr/61991/c2d/trackbac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수
10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울고 또 운 아이 이름 ‘숙명’ imagefile 신순화 2010-06-28 20346
9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동생 출산 함께 한 다섯살 아이 imagefile 신순화 2010-06-21 34503
8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남편과 함께 한 조산원 출산기 imagefile 신순화 2010-06-14 26626
7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병원은 환자 취급, 조산원은 사람 대접 imagefile 신순화 2010-06-07 28386
6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이룸이 이야기 imagefile 신순화 2010-05-30 19144
5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봄이 이야기 imagefile 신순화 2010-05-23 21512
4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연이 이야기 imagefile 신순화 2010-05-13 20327
3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아이 셋에 행복 셋, 그리고 무한사랑 imagefile 신순화 2010-04-30 30095
2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내가 병원이 아닌 곳에서 세 아이를 낳은 이유 imagefile 신순화 2010-04-27 36292
1 [세 아이와 세상 배우기] 글을 열며... imagefile 신순화 2010-04-23 38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