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낭콩.jpg

 

남편이 늦게 퇴근 하던 날, 저녁상을 물린 거실에서 아들은 장마 사이 사이에

수확한 강낭콩 까는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오빠를 따라 이룸이도 거들기 시작했다. 둘째는 알아서 숙제를 시작했다.

모처럼 흐믓한 풍경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흘렀던 'lost star'를 유투브에서 찾아 무선 스피커에

연결에 빵빵하게 틀어 주었다.

아들은 리듬을 흥얼거리며 즐겁게 강낭콩 껍질을 벗겨 잘 익은 콩들을

털어 주었다. 온 집안에 멋진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 이런 저녁도 있구나.

나서서 엄마 일을 도와주는 기특한 아이들이라니...

 

그러나 잠시후 집안은 순식간에 살벌해지고 말았다.

계기는 막내, 이룸이였다.

콩 까는 일이 슬슬 지루해진 이룸이가 제 방으로 가려고 오빠 뒤쪽으로

걸어가다가 (그냥 지나가면 되는것을) 오빠 때문에 길이 좁다며

일부러 오빠 등을 밀며 지나간 것이다.

어린 동생의 행동에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겠지만) 발끈해진 필규는

"야, 왜 밀어!" 하며 바로 이룸이를 다시 밀었다.

 

 이룸이는 (그냥 사과하고 지나가면 되겠지만)

"나, 안 밀었는데 왜 그래!" 하며 화를 내고는

(거기서 그쳐주었으면 좋았겠으나....) 기어코 오빠를 슬쩍 한대 때려주고

제 방쪽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머리 뚜껑이 열려버린 필규는

(적당히 화를 내는 선에서 그쳐주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이게 정말!!" 소리를 지르면서

그 길로 벌떡 일어나 달려가더니 목욕탕 앞에 있는 이룸이 허벅지를

발로 세게 차 버렸다.

 

이룸이는 다리를 부여잡고 넘어져서 대성통곡을 하고, 놀란 윤정이가

방에서 달려 나오고, 필규는 씩씩 거리며 다시 강낭콩앞에 앉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너무 화가나서 음악을 꺼 버렸다.

집안에 울려퍼지는 울음소리....

밀려오는 짜증......

 

나는 이룸이 다리를 먼저 확인해 보았다. 허벅지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오랜만에 맛보던 흐믓한 풍경에 푹 취해있던 터라 순식간에 아이들이 보여준

모든 행동들이 참담할만큼 화나고 실망스러웠다.

 

"필규야.. 꼭 이렇게밖에 못 하겠니?"

"가만히 있는데 이룸이가 먼저 저를 밀었다구요"

"나는 안 밀었다구요, 엄마.. 엉엉"

"밀었잖아. 저게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있어, 정말"

"나는 미는 느낌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밀었는 줄 몰랐지요"

울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막내 때문에 필규는 여전히 분이 안 풀려

씩씩 거렸다.

"아무리 이룸이가 먼저 그랬다고해도 발로 차버리면 니 잘못이 커지잖아.

말로 먼저 해야지, 말로.."

"쟤는 말로 해도 소용없는거 아시잖아요."

"그럼, 말로 해도 소용없을 때는 때리고 발로 차도 되는거니?

그럼 우리집에서는 항상 누군가는 얻어맞거나 때려야할텐데?"

필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윤정이는 이룸이 허벅지를 만져주며 달래주는 사이 나는 조금 가라앉는 아들을

불러  얘기를 해 보았다.

 

"필규야.. 이룸이는 어리잖아. 너 만큼 생각이 깊지 않아. 그래서 어리게 구는거야.

그렇다고 바로 이렇게 폭력으로 응징해버리면 이룸이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몰라.

맞으면 아프고 억울한것만 기억해. 잘못을 생각 못한다고.. 그래서 때리면 안되는거야"

"저도 아는데요, 이룸이는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하잖아요. 잘못도 인정 안 하고.."

"그러니까 어린애지..

이룸이가 니 여자친구라고 생각해봐. 너도 어짜피 연상이나 동갑보다는 나이 어린

여자 친구를 사귈 확률이 더 높잖아. 여자친구가 네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때리지는 않을꺼잖아. 어떻게든 설득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할꺼 아냐"

나는 아들을 이해시킬 적절한 예를 찾았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럼,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겠습니다!!"

아들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선언해버렸다.

"뭐? 뭐라고?"

"그런 여자친구라면 헤어지겠다구요. 이룸이처럼 이렇게 막 나가는 여자친구는

안 사귀는게 훨씬 나으니까요"

 

아이고머니....

나는 말문이 콱 막혔다.

".. 그래... 뭐... 여자친구랑은 헤어지면 그만이지.

그렇지만 이룸이는 동생이잖아. 가족은 내 맘에 안 들어도 헤어질 수 없잖아.

그러니까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봐야지.

다음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우선 말로 좀 해줘. 그래도 고집부리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는 엄마한테 넘기고... 부탁이다.."

"알았어요.."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강낭콩에게 돌아갔다.

구부리고 앉아 강낭콩을 까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 참....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어이없었다.

 

이만한 일로 여자친구와 헤어지겠다고?

흥, 웃기셔..

니가 좋아봐라. 요만한 일로 헤어질 수 있나. 이보다 더한 일로 여자친구가 까탈을 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쩔쩔매면서 달래주고, 기분 맞춰주려고 애 쓰게 될 걸?

아이고, 정말 말은 잘 하지.

그런데 진짜 융통성 없이, 자존심 내세우다가 여자친구한테 채이는거 아냐, 이 녀석?

그럼 안되는데...

에고...

동생이랑 다투고 싸우는 일로 훈계하고 고민하다가 또  삼천포로 빠져버렸네.

아이고.. 나도 정말... 이제 겨우 열네 살짜리 아들 녀석 이성문제를 벌써 고민하고 있네..

크크... 아들이나 엄마나 철딱서니 없기는 똑같구만... 흐흐.

 

그나저나 녀석, 인정은 안 하는데 같은 학교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요즘 남자 아이들보다 여자 아이들하고 더 많이 어울린다면서?

그래.. 때가 된거지.. 바야흐로 청춘의 문 앞에 서 있는데..

여자들한테 관심 없으면 안되지..

 

흥!! 어디 한 번 연애 해 봐라. 어떤 여자 데려올지 기대가 크다 이 녀석아..

이룸이처럼 똑 부러지고, 말 잘 하고, 야무진 여자친구 사귀면 대박인거야.

그때 이런 저런 고민 생기면 그런 것도 엄마랑 좀 나눠주고...

 

다시 집안은 조용해졌고, 아들은 수북했던 강낭콩을 다 까고서야 일어났다.

170이 넘어가는 녀석이 이젠 어른처럼 보인다.

그래... 좋아하고, 설레고, 두근거리고, 고민하고, 벅차게 기쁘고..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런 날들이...

 

기대할께.. 아들아..

속을 알 수 없는 네 매력을 알아줄 그 어떤 여자친구가 나타날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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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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