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로드.jpg

 

겨울 다 간 줄 알았는데 눈이 엄청 내렸다.
하루아침에 눈세상으로 바뀐 날 아이들과 길을 나섰다.
목표는 산길을 넘어 대야미역 근처에 있는 00중국집, 아이들과 짜장면이 먹고 싶을때
들리는 곳이다.

 

전철역에서 차로 6-7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는 마을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지나가는 까닭에 시내에 나가기가 퍽 애매하다. 걸어가면 한 30분 걸리기는 하지만
어린 아이와 걷기엔 너무 멀다. 그런데 산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 있다. 돌아가는 길보다
10여분이나 단축된다. 차가 지날 수 있게 포장되어 있는 곳도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등산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다.
길 이름도 뭔가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이 길을 '짜장로드'라고 부른다.
이 길을 걸어 넘는 것은 짜장면을 먹으러 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짜장면과 탕수육인 큰 아들 필규때문에 동생들도
늘 먹고 싶은 음식을 물으면 '짜장면이요'하는 우리집이다.
전화를 하면 오토바이로 배달해주는 짜장면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이따금 나는
세 아이를 데리고 산길을 넘어 대야미역까지 걸어가 근처에 있는 짜장면집에
가곤 한다. 운동도 되고, 등산도 되는 길을 짜장면을 당근 삼아 넘어가자고 아이들을
꼬드기는데 언제고 싫다는 법이 없다.
힘들지만 재미나게 걸어 넘어 짜장면 먹으러 가는 길..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 산길은 '짜장로드'가 되었다.

 

늘 눈이 푹신하게 쌓인 길을 아이들과 오래 걸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눈도 크게 내린데다
기온도 크게 낮지 않아 딱이었다.
'산길 넘어가서 짜장면 먹고 올래?'했더니 심심하다고 몸부림치던 세 아이들이 신이나서
앞장 선다. 동네 어른들은 어린애랑 어떻게 눈길을 걸어가냐고 염려하셨지만 아이들은
'갈수있어요'하며 나섰다.
그리하야 나와 세 아이는 든든하게 입고 물 한병 챙겨들고 짜장로드에 올랐다.

 

마당지나 언덕길을 내려가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식당 네 곳이 줄지어 서 있다.
마지막 식당을 지나면 바로 산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다.
이룸이는 이 길부터 '엄마, 힘드러워요'를 외쳐댔지만 모른척하고 손만 잡아 끌었다.
필규는 짜장면 먹을 생각에 날듯이 올라가고 일곱살인 윤정이도 오빠 따라 씩씩하게
올라가다. 지난 여름만해도 힘들다고 불평이더니 그새 많이 컸다.

오르막길 지나자 바로 평지다. 눈이 푹신하게 쌓인 길은 지나는 사람들도 없었다.
이룸이도 힘들다  소리 안 하고 재미나게 걷는다. 이렇게 푹푹 발이 빠지는 눈길..
정말 오랜만이다.

 

지루하고 힘들다고 느껴질때는 눈위에 발자국 찍기 놀이도 하고, 길 가에 흐르는
실개천에 눈덩이도 던져 넣으며 놀다 다시 걸었다. 길가 농장에서 흑염소에게
마른잎을 뜯어 주기도 했다.
지난 여름에만 해도 절반은 등에 업혀 지났던 이룸이도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제 힘으로 걸었다. 마지막쯤에서 너무 힘들어 해서 잠깐 업었지만 오빠랑 언니가
내리막길에서 엉덩이로 미끄럼틀 타며 내려가는 모습을 보더니 저도 내린단다.
덕분에 잠깐만 업혔다가 저 혼자 다 내려갔다.

 

산길 내려와 대야도서관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40여분 걸렸다.
이룸이가 힘들까 걱정했는데 그 사이 몸도 힘도 많이 커졌다. 이젠 어디라도
함께 걸어갈 만 하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우리끼리 실컷 책 읽고 새로 도착한 책 열 댓권
빌려서 나왔다. 이백미터쯤 걸어서 식당에 갔더니 아뿔싸.. 문을 닫았다.
할수없이 근처의 다른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과자도 한 봉지씩 사서 마을 버스 타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오후 3시가 넘어 있었다.

 

산길넘어 도서관으로 다시 식당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집으로 내내 상당한
거리를 제 힘으로 걸었던 이룸이는 역시나 많이 고단했던 모양인지 저녁도
안 먹고 오후 여섯시무렵 잠이 들었다. 잘 따라와서 대견하다 싶었는데
사실은 무척이나 고단했던 것이다.

 

날이 풀렸다해도 아직 겨울이고 눈도 많이 왔는데 그렇게 힘들게 어린
애들 데리고 산길 걸어갈 필요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따금은 몸과 마음이 푹신하게 고단한 일을 해 봐야 힘도 생각도
쑤욱 큰다는 것을 애 키우며 느껴왔다. 한 번은 힘들지만 제 힘으로
해 내고 난 일은 그 다음엔 아주 쉽고 조금 더 힘든 일에도 기꺼이
도전하게 아이를 이끈다.

 

여름엔 땀나고 덥고, 겨울엔 눈도 오고 미끄러운 길이지만 힘들게 땀나게
넘고 나면 맛난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길 '짜장로드'..
아이들과 즐겁고 재미나게 넘나들면서 맛있고 행복한 추억 열심히 만들
생각이다.

'실크로드'나 '커피로드'처럼 대단하진 않아도 멋지지 않은가,
우리들만의 '짜장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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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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