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더니 눈세상이었다.
"얘들아, 일어나봐, 엄청 눈이 많이 왔어!!"
이불속에서 꾸물거리는 애들은 놔두고 나 혼자 신이 나서 마당을 돌아다녔다.
이 나이가 들어도 눈 내린 아침은 이렇게 설렌다.
그러나...
음...
애들, 학교는 어떻게 가나.
눈 덮고 있는 차를 흘깃 보니 눈 치우는게 더 귀찮다. 차의 눈이야 금방 치우지만
언덕길 눈은 또 어떻게 하나. 간신히 나가도 올라오는 건 무리겠지.
그래, 그래, 걸어가자.
걸어가는거야.
마침 날도 그닥 춥지 않고 눈은 폭신 폭신 젖은 눈이다.
이런 날은 신나게 눈 속을 걸어야지.
모자에 목도리에 장갑에 부츠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눈이 계속 내리고 있으니까
우산도 쓰고 두 딸과 집을 나섰다.
태어난지 한달이 지난 복실이 새끼 강아지들이 달려와 안긴다.
눈 내린날 제일 신난것은 아이들과 강아지구나..
지나가는 차도 드믈지만 걷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눈이 얼굴로 쏟아져 내려서 이룸이는 자꾸만 얼굴을 손으로 훔치면서도
눈구경 하느라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윤정이는 열심히 발자국을 만들며 걷는 일이 즐거워 보였다.
아아.. 정말 겨울이구나.
눈 내리는 겨울..
이렇게 걸어갈 날들이 많겠구나.
괜히 힘이 불끈 난다.
"얘들아, 이런 노래 아니?
하얀 눈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도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내가 목청껏 부르자 윤정이가 알은체를 한다.
"엄마. 바둑이 말고, 도토리로 해 주세요"
복실이가 낳은 네마리 새끼중에 윤정이가 이름 지은 강아지가 도토리다.
"그래, 그래..
하얀 눈위에 윤정이 발자국
도토리도 같이간 장화 발자국
누가 누가 등교길 걸어갔나
이쁜 윤정 이룸이, 엄마 딸이지"
애들이 좋아했다. 나도 웃었다.
눈 내린 날은 나도 아이가 된다. 이게 참 좋다.
지난 밤 몸이 뜨겁고 기침하며 보채던 이룸이였다.
오늘 유치원을 쉬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눈 내린 마당을 보더니
유치원에 가서 친구들과 눈 싸움 해야 한다며 여벌 바지와 옷을 챙겨 달란다.
이마를 짚어보니 서늘하다. 콧물은 여전하지만 그래, 걸어가보자.
감기 걸리면 찬바람은 쐬지 말고 집에서만 지내라고 쉽게 충고들 하지만
이 집에 사는 동안 경험한 바로는 감기 들었을때에도 바깥 바람을 쏘이며
적당한 외부 활동을 하는 것이 회복이 빨랐다.
물론 너무 아프면 곤란하지만 콜록 거리면서도 아이들은 뛰어 놀고
찬 바람속을 돌아다니며 즐거워 한다.
몸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 아니다. 기대하고 즐거운 기분이다.
눈 속에서 친구들과 놀 생각으로 두근거리는 마음, 신나는 기분
그런 기분이 몸을 일으킨다. 감기를 이기게 한다.
이룸이는 어린 날 나 처럼 볼을 빨갛게 하고 눈 속을 열심히 걸어갔다.
호드득 호드득 눈을 밟으며 신이 나서 걸어갔다.
두 아이를 교실에 넣어 주고 딸들 우산까지 챙겨 다시 돌아왔다.
잠시 눈보라 그치고 햇살 비치자 갈치 저수지 풍경이 그림처럼 환했다.
내가 사는 그 마을이 맞는 건가.. 휘둥그래져서 나는 눈 쌓인 저수지의 풍경에
매혹당한다.
눈은 지금도 내리고 또 내린다.
차는 아무래도 오늘 종일 마당에서 꼼짝도 안 할 것 같다.
오후에는 다시 걸어서 아이들을 마중가야지. 돌아올때는 마을버스를 탈 수 있을지도 몰라.
눈 속에 파묻힌 집에서 혼자 먹을 점심을 궁리하며 행복하다.
점심 먹고 반납할 책을 베낭에 잔뜩 넣고서 뒷산길을 너머 도서관에도 들러야지.
이렇게 눈 오신 날은 눈 속을 많이 많이 걸어다니는거다.
나는 다시 대책없이 철 없는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