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jpg

 

첫 아이를 낳았을때만 해도 ‘내 아이는 다를거야’라는 원대한 착각을 했더랬다. 아직 품에서 고물거리는 첫 애를 안고 유치원 다니는 형제를 키우는 옆집을 놀러가면 집안이 어찌나 정신없이 어질러 있는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힘 넘치는 두 사내아이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온 집안을 누비며 난장판을 만들어 대는데, 그 집에 있다가 말끔하게 정리된 우리집에 들어서면  ‘무슨 애들이 저렇게 유난스럽담. 우리 애는 안 그럴꺼야’ 속으로 흉보며 내 아이를 그윽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대형마트 장난감 매장에서 울고 불며 떼쓰고, 그런 아이와 언성높여가며 싸우는 엄마들을 볼때마다
 ‘쯧쯧... 애를 어떻게 키운거야.. 우리 애는 저러지 않겠지’ 생각했었다.

다른 애가 고개를 까딱하면 그냥 하는 행동같지만, 내 아이가 고개를 까딱하면 ‘엄마 말, 알아들었구나? 세상에..’ 하며 감탄하던 시절이었다.
아아.. 정말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 착각이었던가.
 
 
물론 이런 착각들이 깨지는것은 순식간이었다.
기고 걷기 시작하자마자 집안은 금새 난장판이 되었고 둘째가 태어나니 더 한층 심해졌다.
두 아이는 마치 해리포터 마지막 편에 나오는 ‘복제 주문’에 걸린것마냥 손 대는 것마다 물건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늘어나고 흐트러지는데 도사들이었다. 이불장의 이불들이 모두 쏟아져 나오고 씽크대의 물건들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혼돈을 보면서 한 때 옆집의 그 정신없음을 기막혀 하던 나를 향해 ‘애가 좀 커봐’ 하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날리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품안에서 인형같이 웃던 아이가 크면 어떻게 변하리라는 것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아이를 수없이 불러가며 밥숟갈을 입에 넣어주는 엄마들을 볼때마다 혀를 찼었다. 적어도 두돌이 되기 전에 스스로 밥 먹는 법을 가르칠 것이지.. 하며 나는 자신있어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밥상에서 열살, 여섯 살, 세살 아이에게 번갈아가며 ‘밥 좀 먹어!’ 소리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큰 놈이야 스스로 먹는다지만 세 살 막내는 물론 여섯 살 둘째도 반은 내가 떠 먹이고 있다. 스스로 먹게 놔 두면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 먹고, 세월아 네월하 하며 시간을 끄는 통에 밥 한번 먹고 치우는 일에 반 나절씩 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니 온 우주에서 가장 특별할것 같았던 내 아이들도 결국엔 수없는 아이들처럼 똑같이 애를 먹이며 크고 있다.
 
늦게 결혼해서 첫 아들을 낳았을땐 정말 내가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해서 이런 복을 받나.. 싶었다. 아들 귀한 시댁에 한 방으로 홈런을 날린 귀한 며느리가 되었으니 대놓고 기고만장했었다. 게다가 4킬로로 태어난 튼실한 아이였지, 얼굴도 잘생겼지, 순하게 컸지.. 정말 어디를 봐도 내 아이는 특별해 보였다. 임신전부터 유기농 음식으로 태교도 정성을 들였고, 키우면서도 좋은 음식만 가려 먹일때에는 이렇게 키우는 몸에 좋은 음식을 일찍부터 선별하는 능력이 키워질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지나가다 남이 떨어뜨린 사탕껍질을 주워 냄새를 맡는가 하면, 과일을 간식으로 챙겨 놀러간 놀이터에서는 불량식품을 먹는 형아들 옆만 얼쩡거리다가 어쩌다 하나 얻어먹으면 세상을 다 가진것처럼 행복한 모습을 보여 나를 좌절시키곤 했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지금도 햄버거에 치킨, 짜장면에 탕수육, 돈까스를 노래 부르며 살고 있다. 오히려 늘 애를 너무 유난스럽게 가려가며 키운다고 흉보던 언니의 아들들은 군것질에 목을 매진 않는데  큰 아이는 지금도 껌, 과자, 아이스크림을 매일 조르니 정말 특별하게 키운 것이 더 사단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애들이 다 똑같지 하면서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적어도 내 아이들은 글을 잘 쓸거야.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가 글 쓰는 사람인데 다른건 몰라도 책 좋아하고 글은 남보다 잘 쓰겠지... 믿었다.
 

나도 글 쓰시는 친정 아빠에게 재주를 물려 받지 않았는가. 부모가 잘 하는 일은 아이도 잘 하기 마련이야..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열 살된 큰 아이가 여름방학동안 해야 할 유일한 과제인 ‘나의 방학 이야기’를 해 놓은 것을 보고 정말이지 참담한 실망을 감출 수 가 없었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큰 아이의 학교엔 방학 숙제라는 것이 없다. 다만 ‘나의 방학 이야기’라는 주제로 자기가 보낸 재미난 방학 이야기를 꾸며서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게 되어 있었다.
 

방학 하는 날부터 서울랜드에 동물원에 수영장에, 게다가 집 마당이며 옥상에서 즐기는 특별한 물놀이에 갖가지 재미난 일들을 잔뜩 겪었으니 쓸 것이 많이 있겠지... 라고 나는 기대했었는데 방학 내내 미루고 미루다
 
개학 하기 이틀 전에 해 놓은 아이의 ‘나의 방학 이야기’ 공책엔
 
 
1. 방학 하는 날 서울 랜드에 갔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급류타기 였다.
2. 동물원에 갔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물놀이였다.
3. 수영장에 갔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미끄럼틀이었다.
4. 2층에서 물놀이를 했다. 단점은 얕았다는 것이다.
 

이게 다 였다.
 
제가 경험한 여름방학의 수많은 추억들에 대한 정성스런 회고와 묘사는 눈꼽만큼도 없거니와 성의도 없고, 관심도 없이 그저 제일 짧게 똑같은 방식으로 휘리릭 끝내 버린 것이다. 다른 엄마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녀 온 곳 입장권이며 사진등도 정성스럽게 붙이고, 커다란 전지에 신문처럼 꾸며오는 애들도 있고 스케치북에 온갖 색연필로 그림도 그리고 장식도 해서 멋지게 해 오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계획해서 제 힘으로 해 온다는 것이다.

대안학교를 겨우 한 학기 다닌 것으로 그 정도까지의 창의력이나 열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들의 글은 글쓰는 엄마의 자존심을 와르르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저렇게 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내 전문가적인 조언에도 아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다 했다구요’ 그리고는 끝이었다.

아아아... 내 아이는 다를 줄 알았다.
 
수없는 책을 읽어 주었고, 늘 내가 글 쓰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가끔은 남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도 보며 컸으니 적어도, 적어도 글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 쓰겠지, 표현이 남다를꺼야... 믿었는데 그 마저도 여지없이 나의 착각이었나보다. 근사한 글은 커녕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아들이라니..
 
부모들은 모두 자기 자식들이 어릴때에는 환상을 품는다. 그러다 여실히 깨지기도 하지만 그런 환상, 그런 착각이 없다면 어찌 힘든 육아를 견딜 수 있을까.
 
내가 가졌던 모든 기대를 와장창 깨뜨리며 크고 있는 큰 아이... 그러나 뭔가 있겠지. 뭔가 있을꺼야. 나는 또 이런 기대를 품어 본다.
 
언젠가는, 어떤 일에는 제가 가지고 태어난 특별함을 발휘하지 않겠어?
 
그런데 그 언제가 도대체 언제일까.
그 어떤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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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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