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20.jpg

 

'당신, 필규한테 화 좀 내지마. 딸들한테 하는거랑 필규한테 하는거랑 너무 틀려'

 

주말, 모처럼 마당에 있는 벤취에 남편과 나란히 앉자마자 남편이 내게 하는 말이다.
그렇지않아도 조금 전까지 나는 필규에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던 참이었다.
남편이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필규에게 화를 자주 낸다.
나도 화를 덜내고 싶다. 그런데 정말 아들은 내 성깔에 기름을 붓는다. 너무 자주...

 

밥차려 놓으면 딴짓 하다가 제일 늦게 않는 것 부터 화 난다.
기껏 앉아서는 젓가락으로 깨작 깨작 밥을 찍어 먹으면서 주변에 있는 물건들로 손이 간다.
'밥 먹을 때는 딴 짓 하지 말자'
점잖게 얘기해도
'네'라고 대답만 할 뿐 결국은 제가 만지고 싶은 만큼 주물러야 내려 놓는다. 그리고 또 깨작깨작..
밥 먹는 자세나 습관이나 내 맘엔 하나도 안 든다. 하나 하나 지적하다보면 끝이 없고, 그냥
두고 보자니 내 복장이 터진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여동생이나 내게 부탁하고 안 들어주면 펄펄 뛰고, 바쁠때 내가 부탁하면
엉덩이가 어떻게 무거운지 기다리다가 내가 해 버리는게 차라리 낫다.
그리고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신경쓰지도 않고 아무때나 '안아주세요'다.
그것도 꼭 제가 원하는 장소에서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열살이나 된, 키도 조금만 더 크면 나랑 맞먹을 놈이 기어코 내 허벅지 위로 올라타서 안으려 하니
너무 너무 힘들고 아프다. 그렇다고 얘기하면 '됐어요. 안 하면 되겠네요' 하며 버럭 화를 내버린다.
뭐든지 제가 하는 방식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거다.
이러니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펄쩍 뛸 만큼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김치 담그느라 고춧가루 범벅을 하고 있는데 제가 불러서 바로 안 온다고 화를 내지 않나,
막내 응가 치우고 있는데 당장 와서 안아달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나, 다 큰 녀석이 코딱지 파는
습관은 여전해서 한 마디 하면 '그래서 어쩌라구요!'하며 더 크게 화를 내니 이건 도무지
어떤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눈치도 빠르고 내 감정에 민감함 윤정이나 이제 말이 트여 조잘거리며 말썽부리는 막내와는
큰 아이처럼 밀고 당길 필요가 없으니 화 낼 일이 적다. 필규는 엄마가 저만 미워하고
차별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필규만 내 사정을 이해 안 해주고 늘 제 생각만 한다고 억울해한다.

 

모처럼 시트갈고 그림처럼 치워 놓은 안방 침대 위로 동생들을 죄다 끌고 가서 과자를 먹느라
과자부스러기를 온통 흘려 놓아 나를 또 기함하게 하더니, 열흘 넘게 기침을 하는 막내 생각은
하지 않고 다 저녁에 마당에 수도물이 나오는 호스를 대 놓고 철벅거리며 물장난을 해서
이룸이가 온통 물 범벅이 되게 해서 또 나를 격노하게 하는 식이다.

필규가 막내라면, 혹은 동생들과 나이차가 별로 없다면 일요일 저녁에 찬 바람 맞으며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든 말든 놔둘 수 있다. 그런데 둘째는 여섯살, 막내는 이제 겨우 세살인데
큰 놈이 앞장서 일을 꾸미고 사건을 벌이면 두 동생들은 신이 나서 같이 어울리고
특히 제 몸 건사를 할 줄 모르는 이룸이는 늘 기침과 콧물을 달고 살게 된다.
약하고 어린 아이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큰 아이에게 잔소리를 자주 하게 되는데,  아들은
이런게 다 저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펄펄 뛴다.


뭐든지 제 성에 차게  할 수 가 없는 아들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아들 성에 맞게만 할 수 는 없다. 이제 그 역할은
아빠가 나서서 아들과 둘이 남자대 남자로 풀어야 하는데, 농사짓는 단독주택 생활은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엔 할 일이 너무 넘친다. 이러니 필규는 늘 욕구불만인 모양이다.
대신 학교에서 오후 6시까지 신나게 놀다 오는 것으로 해소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집에 오면
또 엄마와 가족에게 채우고 싶은 것들이 따로 있나보다.
살림하랴, 가축 건사하랴, 틈틈히 텃밭도 신경쓰고 두 여동생 시중들랴, 글 쓰랴.. 나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아들이 삐딱선은 늘 큰 소리가 오가는 신경전이 되고 만다.

 

자식이 많으면 그 중에 한 명은 꼭 엄마를 공부시키려고 태어나는 놈이 있다는데, 내게는 그게 필규다.
태어날때부터 가장 힘들었고, 키울때도 제일 정성과 걱정을 많이 시켰는데 열 살이 된 지금도
도무지 그 정신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다.
큰 아이와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생각하겠지... 하는 내 예상이 번번이 어긋난다.
애는 더 많이 쓰는데 늘 원망만 받으니 내 마음 한 편엔 큰 아이에 대한 서운함이 항상
스며 있어서 까칠하게 나오면 더 크게 화가 난다. 보통 엄마가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지면
자식은 한풀 꺾이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내가 7로 화를 내면 바로 10 쯤 되는 강도로 되받아 버린다.
배려해서 그 정도로 분노를 표현한 내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히고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이다.

 

아들은 말로 키우면 안된다고, 잔소리는 줄이고 더 많이 애정표현 해주라고, 딸들보다 늦되니까
더 오래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변에선 조언을 하지만 내 딴에는 그래서 다른 집 아들들보다
더 많이 배려해주고 기회를 주고 있다고 여기니 늘 억울하다.

한바탕 악다구니를 하고 잠이 들어버리면 잠든 와중에도 제 다리를 내 다리위에 얹는 아들을 보며
아직도 어린 아이구나.. 그저 엄마 사랑과 관심을 더 원하는 어린 아이구나.. 싶어 마음이 짠하지만
다시 아침이 되고 학교 갈 시간이 늦는데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아들을 보면
버럭 거리며 큰 소리를 치는 하루가 반복되고 만다.

 

아들때문에 가장 많이 울었고, 아들 때문에 가장 많이 화를 내고, 가장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 녀석이 내 삶에 스승으로 왔구나... 는 알겠는데 내 사람됨을 가장 많이 건드리고
자극하고 안 보이고 싶은 면을 올올이 들쑤셔서 기어코 직면하게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면
이 녀석 키우다 내가 정말 득도하겠구나.. 싶다.

고집도 세고, 호기심은 어떻게 해서든 채워야 하고, 눈물도 많고, 요구도 많지만 늘 엄마를
원하는 열 살 아들..
첫 아이와 가는 길은 모두가 처음이라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많이 부딛치고 투닥거리고 상처를 주고 '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그래... 늘 가장 고운 말과 가장 아픈 말을 내게 모두 주는
아들이 아닌가.

남편 말대로 아들에게 화를 덜 내고 이 아이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정말이지 제대로
도 닦은 엄마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날들을 열렬하게 부대껴야 할지...
아이고, 겁나라.

아들은 이제 겨우 열살.. 시퍼런 사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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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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