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쉬는 날이면 뽀뇨를 데리러 학교에 간다. 다른 학부형들은 현관에서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와 계단을 지나 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교실까지 가본다. 텅빈 교실엔 아이의 책상과 걸상, 교실 뒤편엔 아이들이 솜씨를 뽐낸 그림들이 걸려있다. 어른 엉덩이 반만 걸칠 수 있을만큼 작은 걸상에 앉았을때 나는 안도한다. 아직 뽀뇨가 어리구나. 집에서 어리광 피우는걸 보며 ‘8살, 심지어 초등학교도 다니는데 그러면 안되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아이 책걸상을 보면서 조금은 누그러진다.

한 달은 되었을까. 그날도 마찬가지로 뽀뇨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차를 주차하고 넓은 운동장을 지나 화단의 꽃들을 보며 여유롭게 가고 있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나 학부모가 없었다. 학부모들이 대기하는 현관에 가보니 뽀뇨와 한 남자아이만 있었다. 남자아이는 현관앞 낮은 담벼락에 올라가 쪼그려 앉아 있었고 뽀뇨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묘했고 나는 그 분위기가 ‘썸타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빠, 얘 고양이야. 한번 만져봐”라고 쓰다듬으니 그 남자아이는 “야옹~”하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뽀뇨가 시키는데로 남자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누구니”, 물어보니 남자 아이는 가만 있는데 뽀뇨가 마치 자기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듯이 “아빠, 얘는 승구야. 귀엽지. 오늘부터 내 고양이가 되기로 했어”. 그리곤 승구는 고양이 소리 자동발사.

왠지 남녀가 조용히 밀회를 즐기는 찰나에 내가 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 임무는 뽀뇨의 하교를 돕는 일, 승구를 남겨두고 뽀뇨를 데려왔다. “쟤는 누구야?”, “승구는 내 남자친구야. 나도 걔 좋아하고 걔도 나를 좋아해”.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서슴치 않게 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오가는 현관에서 밀회를 나누는 모습에 딸이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까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친구였고 절친은 여자밖에 없었던 뽀뇨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이제 ‘남자’친구가 생겼다. 고양이 흉내를 내는 남자친구를 귀여워하는 모습이 마치 연인사이처럼 훈훈한 분위기여서 아빠는 한 방 맞은 듯 ‘띵’하고 말았다. 아빠품안의 아이로만 생각했던데..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 보란듯이 이렇게 썸을 타는건가. “뽀뇨야, 너 승구 좋아하는거 다른 아이들도 알아?”, “아니, 아무도 몰라” 어제 승구랑 현관에서 둘이 있었던 것 뭔가. “어제 승구랑 둘이 현관에서 고양이 놀이 했잖아”, “어”, “그러면 둘이 좋아하는거 다른 사람들이 아는거 아냐”, “아니 아무도 몰라. 다른 사람들은” 아빠가 보기엔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 같은데.

혹여 우리 아이가 좀 빠른건가 싶어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다들 러브라인이 있다고.. 성범이는 우정이를 좋아하는데 우정이는 다른 아이를 좋아하고. 누구누구는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하는데 아직 한글을 몰라서 이름과 하트만 그려서 편지를 줬다나 뭐라나.

그 이후 아빠는 다른 아이들 이름은 까먹어도 승구 이름은 까먹지 않게 되었다. “승구가 왜 귀여워?”, “오늘 승구네 집에 갔다며. 누구랑 같이 갔어” 승구에 대한 질문도 빠지지 않게 하고 있다. 오늘은 딸아이의 러브라인을 응원해본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상호작용을 하고 있고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나는 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생길 러브라인들을 상상하며 미리 예행연습한다는 생각을 갖기로 했다. 업어 키운 딸이 나중에 시집가면 아까워서 어쩔거냐는 얘길 듣곤 했는데 아이 삶은 아이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기에. 우린 서 로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하기에.

2.jpg »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품을 떠나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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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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