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좋으니
하루에 하나씩 도전하기.

일상의 허무함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언젠가부터 시작하게 된 일이다.

- 평소엔 가깝게 지내지 않는 동네 사람에게 먼저 말걸기,
- 언젠간 치워야지..했던 서류더미를 더 미루지 않고 정리하기,
-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 글 하나 완성하기,
- 저녁 반찬 하나 더 만들기,
... ...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실제론 더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항목들도 많다.
그래도, 평소 잘 하지 않거나 마음에만 담아두고
실천하지 못했던 일들을 나 스스로 정해서 하나씩 해결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꽤 재밌어졌다.
뭐랄까.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착각(?)같은 게 드는데
남들 보기엔 별 다를 것 없이 보여도,
아주 작은 시도와 도전, 쌓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다보니
실제 삶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엔 아이들과도
작은 도전을 하나씩 해 보기로 했다.
"이거 하나는 해냈다" 라는 기분으로 긴 방학을 마칠 수 있다면,
2학기를 좀 더 자신감있게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

초등 2학년인 둘째는

하기 귀찮은 일을 뭐든지 나중으로 미루려고 하는 버릇이 있다.

되도록 간섭을 안 하려고 1학기 동안 아이가 하는대로 지켜봤더니,

다음날 시간표나 준비물을 안 적어오는 건 예사고,

숙제도 나중에, 나중에.. 하며 미루다보니, 졸려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밤에 결국 하게 되고 너무 바쁜 날은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채 잠들어 버렸다.

결국 야단과 잔소리로 하루를 끝맺곤 해서

저도 나도 스트레스가 참 많았다.


그래서.

방학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하는 연습.

두번째는 되도록 오전에 할 일을 마치고 오후엔 실컷 놀기.

세번째는 짧은 시간 내에 집중해서 하기.


이런 기준으로 방학동안 해야 할 숙제를 정리하고 계획을 세웠는데

아들에게 주어진 학교의 여름방학 숙제는

국어수학문제집 풀기 / 그림일기 2장 / 식물 관찰일기 2장 / 글쓰기 1장과

일기 등이었다.

스스로 하루에 할 수 있는 분량을 정해,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나면

숙제부터 바로 하는 연습을 방학 첫날부터 시도해 보았다.


크기변환_DSCN6798.JPG
여름방학 숙제로 식물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초등2학년 아들.

처음 몇 일은 숙제를 꺼내고 준비하는 데만 몇 십분은 걸린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는데
하려고 마음먹기까지 걸리는 시간,
시작한 뒤엔 귀찮고 산만한 마음에 정신을 빼앗기느라 걸리는 시간 등을
이겨내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일들이 참 많다.

그런데, 자기 능력에 맞는 과제를 비교적 쉬운 것부터
단시간 내에 해보는 연습을 몇 번 하다보면,
의외로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걸 아이들도 알게 된다.
'생각보다 금방 끝나네?!'
'아침 일찍 할 일을 끝내고 나니, 편하네.'
같은 기분이 반복되고, 거기에 따른 과하지않은 칭찬과 보상을 얻게 되면
다음부턴 스스로 먼저 하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긴다.

여전히 하기 싫은 마음이 있지만, 얼른 해 치우는게
어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걸
알아가기 때문인 듯.
이런 연습을 일주일 가까이 하다보니, 과제를 하는 시간도 점점 빨라지고
집중도도 높아져, 어느새 여름방학 전체 숙제의 2/3가 해결되었다.
아이도 엄마인 나도 모르는 새에 "어? 벌써 이만큼이나 됐네?!" 하고 말이다.
(사실 저학년 공부와 과제는 아직까지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다)

이런 사실에 둘째는 조금씩 신이 났다.
젤 하기 싫었던 그림일기는 얼마전 논에 가서 보고온 가재를 그렸는데
다 해놓고 나니, 굉장히 뿌듯했던 모양이다.
동네 친구, 엄마들을 만나면 서로 숙제 어디까지 했어? 하는 걸,
인사치레처럼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벌써 거의 다 했어요!"하면서 자랑자랑..

이 기세를 몰아서, 우리 그럼 7월 안에 숙제 다 해 치우고
8월엔 신나게 놀러다닐까?? 했더니,
아들은 정말 7월 말, 방학한 지 열흘만에 일기 외의 숙제를 정말 다 해냈다!
짧게는 하루 20-30분, 길어도 40-50분을 넘기지 않고
바짝 집중해서 했을 뿐인데,
평소같았으면 한달내내 질질 끌었을 일을,
이 어려운 걸 아들이 해냈다.
저도 나도 기뻤다.
아들은 동네 친구, 형아들, 할머니 할아버지.. 보는 사람마다
방학숙제 다 했다고 자랑하고, 앞으로의 시간과 자유를
덤으로 얻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아들아, 숙제만 이런 게 아닌거야.
세상 사는 게 다 그래.
제일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해 치우면, 나머지 일들이
훨씬 수월하게 여겨지고 쫒기지 않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단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건 바로 이런거야.

크기변환_DSCN6778.JPG

이번 여름방학,
아들은 작은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8월이 오기도 전에 논으로 밭으로.. 신나게 놀러다니고 있다.
이번에 연습한 것처럼
한해 한해 커나가면서, 부모의 도움이나 조언없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스스로 선택한 일을
차근차근 계획적으로 시도하고 도전해 가는 사람이 되기를.

크기변환_DSCN6777.JPG

도전을 무사히 마친 뒤 먹는 아이스크림같은 달콤한 보상,
이런 맛에 다 사는 것 아니겠니.

이번에 경험한 도전과 성공은
다음에 있을 도전에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칠 거야.
아직 많이 남은 여름방학,
너의 더 많은 도전을 응원하며..
9살 아들의 여름이 또 이렇게 무르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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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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