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장에 다녀오신 분들 너무너무 수고가 많으셨다.

가고 싶은 마음은 넘치는데

해외에서 한국 소식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나같은 한국분들이 많으셨을 거다.

믿고 싶지 않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아직 건강한 시민의 힘이 살아있으니 하나씩 잘 해결되어 갈거라 믿는다.

시민의 힘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금 일본사회의 사례 하나를 소개하며, 다시 함께 희망을 꿈꾸고 싶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식당,

<시민들이 만든 어린이식당> 이야기다.


어린이 혼자 와도 괜찮아요.

숙제를 가지고 와도 괜찮아요.

함께 놀면서 저녁을 먹어요.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2013년부터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식당' 운동의 홍보문구다.

부모의 귀가가 늦어지거나 높은 이혼율로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저녁밥을 혼자 사서 먹거나 그나마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현실이 일본 사회에선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다.

바쁜 부모를 대신해 숙제를 봐주고,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며 밥도 먹을 수 있는

어린이식당은 지금 도쿄, 요코하마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다.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의 엄마 역할'을 대신하는 이 식당은

시작된 지 4년이 지난 지금, 처음 시작된 2013년 21곳에 비해

2016년 7월 기준으로 전국에 320여 곳으로 3년 사이에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어린이들 뿐 아니라, 맞벌이부모, 싱글맘, 독거노인 등 여러 사정으로

따뜻한 저녁을 먹기 힘든 어른들도 함께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모두의 식당>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린이부터 고등학생까지는 무료 또는 100엔(한화 약 1,100원) 정도로,

어른은 300엔 정도의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장소는 개인 주택, 동네 가게의 한 코너, 주민센터의 조리실, 종교단체 시설 등 다양하다.

비영리 목적으로만 개설이 가능하고,

자원봉사자들과 식재료 등의 후원이나 기부만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올 봄에는 드디어 내가 사는 동네에도 이 <어린이식당>이 문을 열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가입해있는 생협 단체의 조리실이 딸린 공간을 무료로 빌려

나와 몇몇 동네 엄마들이 일을 벌인 것이다.


크기변환_DSCN6649.JPG

올해 들어 각 신문이나 방송에서 <어린이식당>사례가 화제가 된 까닭인지,
시작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위에 있는 사진은 동네 가게들이 기부한 식재료로 차린 음식들인데
일단, 동네 가게들, 대형마트 등에 식당운영에 필요한 식재료 기부나 후원을 부탁하면
빵집에선 다양한 종류의 빵들을, 마트에선 달걀과 샐러드 드레싱같은 조미료를,
생협 조합원 중에 텃밭농사를 짓는 분들이 신선한 제철 채소들을,
어떤 분들은 식당 냉장고에 고기를 몰래 넣어두고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쌀이나 국수 면을 기부해 주시기도 했다.
식당이 열리는 날마다 풍성하고 감동적인 작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남거나 버려지는 식재료들을 누군가가 홍보해서 잘 모으고,
또 누군가의 정성스런 요리법으로 따뜻한 한 끼의 식사로 재생산되는,
이 과정에 드는 비용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동력으로 대체되어
동네 어린이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밥이 탄생하는 것이다.

크기변환_DSCN6749.JPG


우리 동네 어린이식당이 열리는 날.

이날의 메뉴는 카레라이스.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다.

40인분의 카레가 만들어지는 냄비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크기변환_DSCN6751.JPG

기부받은 쌀, 채소, 고기만 가지고도 40명이 먹을 수 있는 식사를 만들 수 있다.
최소한의 비용만으로도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풍성하고 따뜻한 한 끼를 나눌 수 있다는 희망을 매 순간 확인하게 된다.

크기변환_DSCN6653.JPG

핵가족 단위의 작은 부엌과 거실을 벗어나,
사회의 부엌과 거실을 만드는 어린이식당.
음식이 완성되면, 참가한 아이들 어른들, 조리실에 있던 스탭들까지
모두 함께 앉아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며 저녁을 함께 먹는다.
0-5세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하는 젊은 엄마들이 참 많고
좀 큰 아이들은 먼저 식당에 와서 놀거나 숙제를 하다
일을 마치고 온 부모와 합류해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크기변환_DSCN6754.JPG

처음 어린이식당에 온 아이가 낯을 가리는 바람에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엄마와 단 둘이 밥을 먹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억지로 친해지려고 너무 애쓰지 않는 분위기,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편하게 식당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크기변환_DSCN6654.JPG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을 나는 깨고 싶다.
단 5천원 정도만으로도 달콤하고 훌륭한 디저트를 많은 사람들이 나눠먹을 수 있다.
작은 조각의 케잌이지만 사람의 손과 정성을 거치면 그게 가능하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맛으로 정서적인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크기변환_DSCN7207.JPG

나는 우리 어린이식당 조리팀의 리더를 맡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연말에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를
어린이식당에서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들이 와아- 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고, 기획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사진은 연습삼아 만들어본 트리 모양 감자샐러드!
돈보다는 지혜와 정성으로,
아이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현실화시키고 싶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 심각한 것이 관계의 빈곤이다.
일본 시민들은 '밥'이 이어주는 관계의 힘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낼
힘을 기르고 있다. 시민 차원에서 시작된 어린이식당은 시작된 지 몇 년만에
벌써 정부의 복지 기관들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올해 전국 지자체 중 처음으로, 키타큐슈 시가 주체가 되어
어린이식당을 열기로 했다.
새로운 형태의 복지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린이식당이 제공한 셈이다.
전국의 각 초등학교 근처에 하나씩 어린이식당을 정부 차원에서 개설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1mm라도 사회가 나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고,  어린이식당 활동가들은 말한다.

한국 시민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1mm 정도가 아니라, 10m, 100m 이상
미래를 향해 훌쩍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더 이상 국가 차원이 아니라, 각 나라의 건강한 시민들이
지혜를 나누고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귀하고 이쁜 아이들이 우리 곁에 살아숨쉬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힘과 용기를 잃지 말기를.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시민들이 가진 각각의 힘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 퇴행을 거듭해 온 이 현실을 이겨내 보자.

춥고 긴 겨울이 시작되고 있는 요즘,
모두 따뜻한 밥 잘 챙겨드시고
건강하게 무사히,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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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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