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그래 맞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아이 키우는 일이 너무 자주, 많이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잠시, 아주 잠시동안만.

복잡한 이야기, 머리아픈 이야기들은 거기 좀 놓아두고,

한 아이가 태어나서 14년 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한번 따라가 보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 그 끈이 이어진 길을 쭈욱 따라간 아이가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14살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그림책을 무척 좋아했다.

동서양의 좋은 그림책들 사이에서 3,4년을 즐겁게 살다가

애니메이션이란 걸 보기 시작했다.

또래 아이들이 다들 보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특히 좋아했던 건,

<호빵맨>과 <톰과 제리>.

너무 열심히 봐서 엄마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6,7살 때쯤엔 아기였던 동생을 데리고 <톰과 제리>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실제로 재현하면서 놀이를 즐기는 걸 보고 좀 신기했다.


레고, 원목블럭 등 집에 있는 장난감들을 총동원해서 세트를 만들고

시디 플레이어에 음악을 골라 비지엠으로 틀고,

제리 역할(동생)에게 대사를 정해주고

톰 역할(딸)을 하는 자기는 대사 치랴, 세트 바꾸랴, 음악 바꾸랴,

동생 연기 지도하랴;;...  무지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 더 커서는 집에 있는 비디오카메라로 자기들 놀이를 녹화해서 보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흉내내는 걸 즐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세계에 입문.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봤다.

마녀배달부 키키,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 아리에티, 모노노케 히메 ...

대사를 달달 외우는 건 물론, 애니메이션의 그림, 음악, 스토리까지

관련 책이나 영상자료들을 도서관이나 인터넷에서 보이는 대로 찾아 탐닉했다.


그렇게 초등 4학년 쯤에 들어선 아이는

운명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라이언킹>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눈의 여왕>도, 이건 특히 음악을 아주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크기변환_DSCN7066.JPG

<라이언킹1,2,3>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좋아했는지...
4,5학년 때 아이가 썼던 공책들을 보면 어디서든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학 문제 풀다가 뜬금없이 사자들이 떼로 등장하는데;;
이 시기엔 그림을 정말 열심히 그리던 시기였다.
<라이언킹> 주제곡들을 들으면서 애니메이션 그림을 흉내내며 그리는 게
당시의 딸아이가 가장 행복해하던 시간이었다.
가끔은 보기에 애처로울만큼(?!) 너무 좋아해서
아이의 생일날, 뮤지컬<라이언킹> 라이브공연을 보여줬더니
더 심각하게 빠져들어만 갔다...
그렇게 아이는 덕후가 되어갔다.
애니메이션 덕후.

그런데 엄마인 나도, 아이가 좀 큰 뒤에 알게 된 건데
사실은 어떤 분야든지, 덕후라는 말까지 들으려면 진짜 이것보다 더 해야 된다는 거다.
진짜 덕후들은 정말 대단해서 평범한 덕후들은 따라가지도 못 한다.
어쩌면 딸아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수준은, 자기 방식대로 즐기는 정도인 것 같다.

지브리나 디즈니 정도야 뭐, 엄마인 나도 잘 아니까
함께 대화가 잘 통하는데
초등6학년 이후로는 내가 잘 모르는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아이가 뭐라 열심히 설명을 해 주어도, 주인공들 이름 외우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니..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중학교에 간 딸아이에겐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크기변환_DSCN7035.JPG

평소에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잡지에
딸아이가 그림을 그려서 보낸 적이 있는데, 그게 잡지에 실린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사진 속 중간에, 빨간 머리띠를 한 여자 주인공 그림이 바로 우리 아이가 그린 그림인데
집에서 늘 그리던 아이 그림이 인쇄된 책에 실린 걸 보니 정말 신기하고 재밌었다.

또, 학교 글쓰기 과제로 '전쟁'을 주제로 쓰는 게 있었는데
딸아이의 글이 학교 대표로 뽑혀 전국글쓰기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라고 물어보니,
아이는 <라이언킹>에 나오는,
어른 사자들이 의미없이 하는 전쟁에 대해 아기사자가 반대하는 대사를 예를 들어
전쟁과 인권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썼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그림을 날이면날마다 따라 그릴 때는, 얘가 미술을 좋아하나.. 싶다가,
또 글을 열심히 쓸 때는, 이건 또 뭐지.. 싶다가,
음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때는, 노래가 하고 싶은 건가?? 싶었는데
중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간 수업참관 때 교실 뒤에 붙은 반 아이들 장래희망 란 중에
딸아이의 이름 옆을 보며, 엄마인 내 눈에는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거기 적혀있었던 두 글자는 바로, 
성.우.

그러니까 딸아이는,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물어보면 자기도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림도 재밌고, 스토리 만드는 것도 재밌고, 음악은 진짜진짜 좋고,
목소리 바꿔서 대사하는 것도 너무 재밌겠단다.

중학교 입학 전부터 관심을 가지더니,
딸아이는 입학과 동시에 학교 <브라스밴드부>에 가입해서 활동 중이었는데
거기서 악기를 몇 가지나 다루며 음악을 즐기는, 멋진 선배들을(만찢남, 만찢녀가 많다^^)
많이 만나 그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처음 가입하자마자, 선배들이 "무슨 노래 듣고 싶어?" 하고 물었는데
모기만한 목소리로 "... 지..지브리요.." 했더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토토로>의 주제곡을 경쾌하게 연주해 주더란다.
초등을 갓 졸업한 아이에게 악기연주가 가능한 중3이 얼마나 거대하고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좋은 선배들을 통해 막연하게 알던 음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악기 연주도 배우면서 아이의 덕후기질은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에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가진 딸아이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악기를 단 몇 달만에 익숙하게 연주하게 되었고
담당 음악선생님께 폭풍칭찬을 받으며 선배들과 함께 큰 무대에 오르는
선택까지 받게 되었다.
1학년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 했다.

크기변환_DSCN7148.JPG


같은 지역 중학교들이 모두 모여 열리는 큰 음악대회에

입학한지, 겨우 몇 달밖에 안 되는 우리 아이가 학교대표의 일원으로 서게 되었다.


크기변환_DSCN7149.JPG


그동안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에서 직접 연주하게 된 아이의 마음은 도대체 어떨까.

내성적이고 부끄럼이 너무 많아,

늘 엄마 다리 뒤에 숨어서 세상을 엿보던 아이가

저 무대 위에 속해 있다니 ..

2층 관람석에 앉은 엄마는 남몰래 주먹울음을...;;


14살, 중1 2학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의 덕후라이프는 일단 여기까지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어떤 선택을 할지, 아이도 부모인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의 끈을 놓지않고 끊임없이

제 갈 길을 찾아가고 있다.


부모인 나와 남편이 해 준건,

아이의 덕후생활과 일상이나 학교생활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잘 지켜보고 도와준 것.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기고 이야기 들어준 것 정도밖엔 없었다.

그리고 뭘 하든, '베스트 원'이 되려고 애쓰기 보다 '온리 원'이 되어보라고 늘 얘기했다.

너만이 할 수 있는 것, 너 안에만 있는 것을 표현해 보라고.


아이가 자랄수록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10대 그리고 20대 사이에

한번쯤은 꼭 한번쯤은, 좋아하는 것에 충분히 빠져보는 경험이

꼭 사치이기만 할까 하는..

한번쯤은 그렇게 이기적인 선택을 해 봐야,

그 이후의 삶을 제대로 견디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막 시작된 <아날로그 육아>시즌2에는

10대가 된 큰아이의 새로운 도전 이야기가 많이 등장할 것 같다.

좋아하는 세계를 찾은 아이는 진학할 고등학교도 벌써 생각하고 있는 듯 하고,

새롭게 배우고 공부하고 싶은 것들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아이의 덕후생활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꼭 망하는 길로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00만 한다며 내버려두지 말고, 아이가 00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는지

그걸 통해 아이가 어떤 위안을 받는지 천천히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 하나에 아이 삶의 많은 비밀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시작은 거기서부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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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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