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방학, 친구의 소개로
'수납/정리정돈' 분야의 강사 일을 하시는 분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살림 방법에 대해 오랜동안 연구를 해 온 분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자리에 잠깐 참석하고 왔는데,
원한다면 집안 곳곳의 수납공간을 구경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청소, 살림, 수납 등을 주제로
일본 TV에도 자주 출연하시며 전국 강연을 다니시는 이 분은
우리가 잠깐 머문 1,2시간 동안에도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셨는데
하루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나누고 효율적으로 쓰는가,
물건 뿐만이 아닌 그런 일상 연습 자체가
정리정돈의 기본이라고 강조 하셨다.
눈앞에 닥친 일이나 과제를 대할 때,
일단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한 순서를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1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실에서 모임 중이었는데
그 분들이 다 돌아가고, 거실을 치우고 정리하는데(위 사진 모습)
겨우 10-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게 너무 신기했다.
집안 공간 중에 거실만이라도
불필요한 물건이 없도록 정리가 잘 되어있으면
언제 어느 때 사람들이 찾아와도 금방 모임을 가질 수 있단다.
취재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효율적인 살림 공부 모임을 집에서 자주 가지고
함께 공부하다보면 얻는 것도 많고
밖에서 낭비되는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이 분이 이끄는 모임에서는,
가계부 쓰는 걸 가장 중요하게 지키고 있다는데,
신순화님이 얼마 전 글에서 말씀하신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
- 일본에선 이걸 <엔딩 노트>라고 부른다.
도 평소에 생각날 때마다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랍장 한 켠에 이 '엔딩노트'와 '의료관계파일'이 꽂혀있는 걸
보여주셨는데, 자신이 갑자기 쓰러지거나 한 경우,
가족 누구라도 이 파일만 들고 가서 의사에게 보여주면
병원에서 무의미하게 허비될 시간과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어
위급한 상황에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보험증이나 병원카드, 지금까지의 병력에 대한 기록,
최근 복용중인 약 등에 대한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된 파일이었는데
이건 나이드신 분이 아니라도
가족 구성원 모두 이런 자료를 평소에 정리해 두면
유용하게 쓰일 아이디어 같았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베란다 큰 도자기 화분에 아름답게 핀 수련 꽃이 무럭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바빠보이는 분인데, 적지 않은 연세에 전국으로 출장까지 다니시면서
베란다 화분들까지 언제 다 돌보지??
부러움 반, 신기함 반..
침실과 자녀분 방 외에는 어느 수납장이든 열어보고 사진찍어도 좋다고 하셨는데
수십년간 실천해 온 청소와 정리정돈 전문가다운 포스였다.
기본 구조를 짜 두고 늘 하던 순서대로만 공간을 유지하면
청소시간도 훨씬 줄일 수 있고, 삶에 대한 의욕? 자신감? 이런 게 드는걸까.
다음은 부엌 수납공간.
이건 정리정돈 책에서도 자주 보던 방법인데
각 바구니에 수납된 물건 사진을 찍어 붙이는 방법.
일일이 속을 확인해보지 않고도 한 눈에 파악되는 장점.
구경할 땐 격하게 공감하다가도,
우리집에 돌아오면 절대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내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굳이 그럴 필요없기 때문일까?
싱크대 하단 수납장 모습.
그릇마다 자기 공간을 정해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
이렇게 하면 좁은 공간에 많은 식기들을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다고.
여긴 욕실/세면대 수납장.
언뜻 보았을 때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우리집 수납장을 열어보고는
이 사진이 특별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일 윗 칸에 여백공간이 많은 흰 바구니 두 개가 있는데
여긴 다 쓰고 난 물건을 담아두는 곳이었다.
욕실, 세면도구는 다 쓴 다음에도 제때 버리질 않아
새것, 이미 쓰고 있는 것과 함께 섞인 채 공간이 낭비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사진에서처럼 한 곳을 정해 다 쓴 물건을 따로 모아두면
시간 날 때 거기만 싹 비우면 되니까, 정리시간이 단축된다는 논리였다.
단순히 치우고 정리하고 가지런히 나열하는게 정리정돈이 아니라,
일상의 패턴, 공간을 대하는 사람의 심리, 습관 등을
곰곰히 관찰한 바탕에서 나온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림 뿐 아니라, 육아나 공부에도 이런 식으로 적용하면
굉장히 효과를 많이 보게 될 거라는 조언을 들으며
방문이 마무리되었다.
이날, 정리정돈 전문가의 집을 구경하며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엉뚱하게도 함께 모인 분들이 점심식사로 계획하신 <샌드위치 파티>였다.
모임 때마다 점심 메뉴 하나씩을 각자 준비해 오면 그걸 다 모아 함께 먹으며
공부를 한다는데,
내가 방문한 날은 각자 샌드위치 한 종류씩을 다양하게 준비해 오셨다.
달걀 샌드위치, 참치 샌드위치같은 평소에 자주 먹는 종류에다
크림치즈에 파인애플을 잘게 썰어넣은, 어디 브런치 가게에서나 먹어본 듯한 종류,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크림이 듬뿍 든 종류,
양상치와 토마토에 햄, 치즈까지 넣은 종류 등
그러니까, 내가 한 가지 샌드위치를 만들어가면
한꺼번에 10가지 정도나 되는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다는 거다.
집주인은 차와 음료, 수박을 준비해 주었다.
밖에서 비싼 브런치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집안에서 한상 가득 차려, 근사한 샌드위치 파티를 즐기는 중년의 주부들.
둘째들을 데려간 우리에게 남은 샌드위치를 골고루 넣어서
양손 가득 들려주시던 고마움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풍성한 삶의 효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일상의 노력.
정리정돈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돌아온
지난 여름 어느 하루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