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첫 눈이 내린 날.  눈 덮인 놀이터 >>

 

 

영상의 기온으로 비교적 포근한 겨울을 보내던 도쿄에도

오늘 첫 눈이 왔습니다.

일본에선 오늘이 성년의 날이라 주말부터 3일 연휴가 이어졌지요.

(참, 일본은 3학기제로 지난주부터 겨울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있답니다. 겨울방학이 짧은 대신 봄방학이 2주정도 3월말에 있고, 새학년은 4월부터 시작됩니다)

 

3학기에 큰아이 학교 수업 중에 스케이트 실습이 있어서

그 전에 한번 다녀오자 싶어 주말에 네 식구가 실내 스케이트장으로 고고씽.

둘째는 처음이라 엄마 아빠 손잡고 두어 바퀴 엉거주춤 돌면서 무서웠는지

안 타려고 해서 남편과 교대로 큰아이 타는 걸 봐주면서 함께 탔지요.

넓은 실내 스케이트장에 멋진 음악이 흐르고

어설픈 실력이긴 해도 얼음 위를 달리는 기분이 어찌나 신나던지.

둘째 낳고 이런 데 오는 게 얼마만인가.. 싶고

무엇보다 얼마 타지도 않았는데 점점 한가운데로 이동하며 신나게 잘 타는 딸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암튼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남편과 다시 교대해서 둘째 간식을 먹이며 아빠랑 딸아이가 타는 걸 보는데

저도 모르게 콧끝이 찡.. 했답니다.

 

겨울방학 동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늘 요구가 많은 어린 동생에게

시달리다(?) 며칠 전에 "동생 필요없어!!!!!!!!!!"하며 대성통곡을 했던 일이 있었어요.

동생이랑 잘 놀아주는 누나이긴 한데

둘째가 누나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화장실도 따라갑니다;;)

같이 잘 놀다가도 한번씩 폭발할 때가 있는데 요즘이 그런 때였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동생에게서 벗어나 혼자 자유롭게 얼음 위를 달리며

새세상을 만난 듯 행복해하는 딸아이가 너무 이뻐 보이더군요.

레깅스에 짧은 치마를 입혀 올걸.. 하는 달콤한 아쉬움에 젖어있던 그때,,

너무 행복할 때마다 문득 느껴지는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제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둘째는 지금 내 옆에 있고 첫째는 아빠랑 있고(두 눈으로 다시 확인)

뭐지??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거지..??

아!!!!!! 그렇다. 가방이 없다! 가방이 없어!!!!!!!!!!!!!

긴 끈의 작은 가방을 대각선으로 매고 스케이트장에 들어섰던 저는

이런저런 요구가 많은 둘째 아이 땜에 가방을 남편에게 맡겼다가 다시 받았다가 했는데

내 몸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가방은 없고

머얼리서 스케이트 타는 남편 몸을 눈으로 샅샅히 훑어도 가방은 보이지 않았어요..

어디지.. 어디에서 잃어버린 거지.. 

일단 남편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딸아이도 놀라서 따라오고.

"가방이 없어!!! 가방이 없다구!!!!!!!!"

남편도 자긴 들고 있지 않았다고 잘 생각해보라고 그러는데,

넓고 시원해 보이기만 했던 스케이트장이 갑자기 너무 무섭고 광활하게 느껴질 때 쯤..

아! 알 거 같아!  거길거야!

 

스케이트장에 막 입장했을 때

둘째 아이 적응하게 해 줄려고 메인 링크 옆에 있는 작은 유아 링크 벤치에 앉아있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화장실 간다 어쩐다 하며 가방을 벗었다 들었다 하면서 의자에 잠시 올려둔다는

게 그대로 둔 채, 메인 링크로 온 게 아닐까. 

근데 그렇게 상황 파악이 되고 보니 더 절망스러워지더군요.

그때가 언젠데..

두 시간?  아니 그것보다 더 된 거 같은데...

놀라 눈이 동그란 세 식구를 뒤로 하고 스케이트화를 신은 채 겅중겅중 뛰듯(얼마나 흉했을까요;;)

유아 링크로 향하고는 있었지만

포기하자.. 며 저의 내면은 벌써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긴 끈의 여자 핸드백 -  안 열어봐도 지갑이 든 게 분명해 보이는 가방에

네 식구의 경제활동 전체가 담긴 아줌마의 지갑은

한번 잃어버리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평소엔 지폐도 몇 장 안 가지고 다니다가 그날따라 은행다녀온 직후라

현금도 빵빵하고 각종신용카드에 신분증에 회원권, 도서관카드... ...

그런 생각으로 괴로워하며 겅중겅중 뛰는데

유아링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 곳에

제가 아이들과 앉았던 벤치가 눈에 들어오는데,,

 

아.............. 가방이 보여.......................(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며)

 

아!!!!!!!!!!!!!!  있다!!!!!!!!!!!!!!! 가방이 있다!!!!!!!!!!!!!!!!!!!!!!!!!!!!!!!!!!!!!!!

 

얼른 다가가 가방을 냉큼 집어들고

'그래도 지갑은 없을지도 몰라'(마지막까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마음의 준비;;)

하며 지퍼를 열었는데

지갑도 있었어요!   열어서 확인해보니 돈도 그대로. 카드도 제자리. 손 댄 흔적이 없더군요.

 

그렇게 저는 다시 세 식구의 품으로 밝게 웃으며 돌아왔습니다^^

 

그날, 스케이트장에 있던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어찌나 다 사랑스러워 보이던지요♡

남은 시간동안 정말 행복하게 스케이트를 타고 왔어요.

 

그러고 보니, 지난 12년동안 여기 살면서

어린 아이들 데리고 외출해서 깜빡하는 정신에

가방이나 물건을 잃어버릴 뻔 했던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더군요.

가방은 아니지만, 친척 결혼선물로 백화점에서 큰 맘먹고 산, 포장도 근사하게 한

쇼핑봉투를 붐비는 전철 역에 두고 오거나, 은행 현금지급기 위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오거나..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거든요.

옛날보다 일본도 많이 변해서 꼭 그렇지 않은 일도 요즘은 많이 일어나고

제가 이번 스케이트장에서도 운이 좋아서 그랬는 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에 대한 신뢰감이 새록새록ㅎㅎ

유아링크 벤치에 앉아있던 부모님들, 제 가방을 한쪽에 비켜두지도 않고

가방을 피해 비좁게 앉아계시던 귀여운 모습들이 떠올라 혼자 많이 웃었답니다.

 

새해가 된 지 얼마도 되지 않아

몇몇 친구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이 있어 좀 우울했는데

이번 일로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세상살기가 팍팍해지고 더 힘들다 해도 이렇게 가끔은

제대로 되어있는 세상의 한 귀퉁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도 살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네요.

저 자신부터 그런 한 귀퉁이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구요.

 

아무튼, 아이들과 외출할 때 항상 가방은 잘 챙기고 자주 확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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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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