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jpg

 

"아 참, 엄마, 어떻게 됐어요? 헌법재판소.. 결과 나왔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열 세살 큰 딸이 묻는다.

맞다. 우린 어제 낙태죄가 헌법재판소에서 어떻게 결정이 날지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다.

"아..낙태죄 폐지 여부? 오늘 헌법 재판소에서 낙태죄에 대해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어"

"헌법불합치가 뭐예요?"

"어떤 법이 헌법에 맞는가, 위배되는가 할 때 '위헌'이면 그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는건데

'불합치'는 그 법이 위헌이긴 한데 당장 없애기에는 사회에 미칠 영향이 너무 클 때 일정한 기간을 두고

새로 법을 만들도록 한다는 뜻이야. 이제 국회에서는 내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해서

새로운 법을 재정해야해"

"낙태, 즉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불법이라고 해도 이미 사람들이 다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수없이 낙태가 일어나고 있지만 처벌 받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그러면서도 불법으로 되어 있으니까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면 범죄자라는 낙인이 붙었지. 실제로 법적 효력이 없는 법이었기도 한데...

문제는 이 법이 여자한테만 책임을 묻는다는거야. 임신은 남녀가 함께 하는 일인데 임신 중절 수술을

받으면 여자만 처벌을 받아. 임신을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자고, 도저히 낳을 수 가 없어서

낙태를 하려고 하면 불법으로 여자를 처벌한다고 하니까 여자들에게만 가혹한 법인거지.

그런데 낙태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뭐때문일까?"

"성폭행같은 것도 많고....."

"물론 성범죄로 임신을 하게 되는 여자들도 있는데 더 큰 이유는 원하지 않는 임신이 많기 때문이야.

임신을 원했다면 당연히 출산을 하겠지. 그런데 원하지 않는 임신이 많은 것을 왜 일까?"

"..."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피임', 즉 임신을 피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해.

그런데 피임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을까?"

"남자, 여자 둘 다요"

"맞아. 성관계를 하는 남, 녀 모두에게 있어. 그런데 적지않은 남자들이 피임은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임신이 여자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당연히 피임도 여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런데 임신이 여자 혼자 하는게 아니잖아. 정자를 주는 남자의 책임도 절반이 있잖아. 그러면 당연히 피임에

대한 책임도 나눠야 하는데 여러가지 것들을 따져봐야해.

가장 흔한 피임법이 뭐지?"

"콘돔이요"

"그래, 콘돔이야. 콘돔은 남자가 쓰는 거니까 남자들만 피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아. 피임에 대해서 남, 녀가 서로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콘돔을 가장 흔하게 쓰는 이유는

콘돔이 가장 저렴하고, 안전하고, 쓰기 편한 피임법이기 때문에 그래.

여자가 쓰는 콘돔인 '페미돔'같은 것도 있으니까 여자도 그걸 쓰면 되지... 생각할 수 있지만 페미돔은

콘돔보다 몇 배가 비싸고, 하나에 만원쯤 한대. 파는 곳도 별로 없고, 여자의 생식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몸 속으로 집어 넣는 것도 매우 어려워. 굉장히 불편해.

여자가 먹는 피임약도 있지만 이것 역시 비싼데다 21일동안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먹어야 하는데

하루라도 깜박 잊고 안 먹으면 피임 효과가 사라지는 등 굉장히 여러가지를 신경써야 해.

게다가 피부 발진이나 소화불량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이런 현실이 있기 때문에 남자가 콘돔을 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야. 그런데 한국 남자들의 콘돔

사용비율은 미국 초등학생보다도 낮아. 성관계할때 느낌이 안 좋다는 등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꺼린대. 그러면서 피임은 여자가 알아서 하기를 바라는거야.

성관계를 하기 전에 파트너끼리 이런 부분에 대해 서로 충분히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고 같이 협조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부분이 아직도 너무 부족해.

심지어 성관계하기 전에 피임에 대해서 여자가 물으면 경험이 많다는 둥, 까다로운 여자라는 등 이런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하고..

흔히 낙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미혼 여성들이 할것 같지만, 결혼한 여성들이 하는 경우도

엄청나게 많아.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부부관계에서 여전히 피임에 대한 여자의 주장과 요구가

쉽게 무시되고 있다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낙태죄가 사라지면 여자들이 마음놓고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정말 그럴까?"

"아니요? 낙태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데요"

"맞아. 그렇게 말 하는 사람들은 평생 낙태를 경험해 본 일이 없거나, 앞으로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일꺼야. 한 번이라도 낙태를 경험해 본 여자들이라면 그 일이 한 여자의 몸과 정신과 영혼에

얼마나 많은 충격과 아픔을 주는 일인지, 여자의 전 인생에 걸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거든. 결코 쉽게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실제로 낙태죄를 폐지한 나라들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남자들의 피임에 대한 이해와 협조는 너무나도 낮고, 성관계에서 여자가 주장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성관계의 결과로 임신이 되면 이 역시 여자가 오롯이 책임을 져야 하니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겠어. 낙태는 불법인데다 불법으로 시술을 받으려 해도 병원비며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고 어린 여자들이 임신을 하면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산부인과를 드나들기도 어려우니까

낙태를 하기 위한 온갖 위험한 일들을 감수하잖아"

"맞아요. 높은데서 막 뛰어 내리기도 하고.."

"그래, 임신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보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들은

위험한 약물을 먹기도 하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거나 험한데서 일부러 구르기도 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몸 속에 넣기도 하면서 수많은 위험에 노출이 돼. 그 과정에서 평생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거나, 큰 병을 얻거나, 몸이 크게 상하기도 하고...

이런 일들이 너무 어려워서 출산을 결정하더라도 막상 아이를 낳으면 또 어떤 문제들이 생기니?"

"육아비도 많이 들고, 돌 볼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래.. 차라리 미혼모가 아이를 낳았을때 사회가 그 아이를 일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똑같은

권리를 주고 엄마와 아이가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낳아서 기를수도 있지.

복지가 잘 된 어떤 국가는 학생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 엄마가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아이 돌봄을

지원하면서 어린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2류 시민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돕는데, 우리 나라는 안 그렇잖아.

미혼모라고 손가락질 받고, 학업이나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제대로된 지원이

없으니 엄마도 아이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되잖아. 힘들게 낳아도 제대로 보호해주니 않는

사회에서, 미혼모가 아니라 결혼한 부부들도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서 낳고 싶어도

임신을 망설이는 이 나라에서 생명은 귀중하니 무조건 낳으라고만 한다면 그건 너무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면 그 생명을 품은 여자의 건강과 행복도 소중하게 지켜줘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혀 나아지지 않으면서 생명만 소중하다고 부르짖는다면 여자들은 결코 동의할 수 없어.

또 어떤 사람들은 애를 안 낳을거면 섹스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섹스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니야. 섹스는 인간이 인간과 나누는 가장 내밀하고 따듯하고 행복한 소통이 되어야지,

그런 과정속에서 서로 원한다면 아이를 갖을 수 있는거지, 임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것은 여자의 몸을 그저 출산도구로만 보는 정말 편협한 생각일 뿐.."

"낙태죄가 폐지된다고 해서 임신 중 아무때나 낙태를 하는 것은 아니야.

이젠 낙태라는 말 보다 '임신 중단'이란 표현이 맞아.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서

임신 중단이 가능한 시기를 정해야 하고, 임신 중단을 원할때 안전하고 편리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임신 중단을 위한 의료비 지원 같은 제도도 만들어져야 하지.

우린 그런 법을 국회가 만들어가도록 의견을 내고, 지켜보고, 지지하고, 혹은 반대하며 좋은 법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하는거야.

그리고 그 전에 야동과 몰카등 디지털 성범죄를 통해 성에 대해 왜곡된 지식과 자극을 어려서부터

얻을 수 있는 우리의 환경속에서 학교 성교육은 이런 아이들에게 전혀 와닿지도 않고, 동떨어진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고쳐져야지. 선진국일수록 어렸을때부터 학교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이

이루어져. 피임과 섹스,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에 대해서 제대로된 지식을 가지고 클 수 있도록

교육도 달라져야 되고..

모든 성관계는 임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큰다면, 임신이 여자의 몸과

마음, 일상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배우면서 자란다면, 피임에 대해 남, 녀가 서로가

동등하게 의논하고 협조하는 그런 문화속에서 자란다면 원치않는 임신으로 인해 임신 중단을 해야

하는 일 자체도 줄어들겠지.

이제 여자들은 더이상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아.

피임에 비협조적이고 무관심한 남자와의 섹스를 원하지도 않고..

너도 성인이 되면 너의 성생활은 네 자유와 선택에 따라서 하는거야. 그렇지만 어떤 파트너든지

피임에 대해서, 성관계로 인한 임신 가능성에 대해서, 그 모든 일을 감당할 네 몸과 마음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함께 나누고, 도울 수 있어야 해. 그렇지 못한 파트너라면 더 이상

만날 필요도 없고..."

"자.. 무려 66년 만에 낙태죄가 폐지되었어. 세상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도 매일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일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어떤 이해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를 해 나가는 거야.

우린 행복하고 충만하고 멋있게 살아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이니까...

오늘 공부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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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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