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그러니까 성윤이가 어린이집에 나간 지 채 일 주일도 안 됐던 그날의 점심 시간. 장모님은 성윤이가 선생님 무릎에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다가 밥을 다 먹었을 즈음에 식당으로 다시 가셨다. 그런데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있는 녀석, 그리고 녀석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외할머니가 다가가니 녀석은 할머니 품에 안겨서 대성통곡을 했다. 양볼에는 울긋불긋 반점이 보였다. 






“성윤이가 식당 문을 여닫는 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아이가 밀어서 이렇게 됐어요.”

선생님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며 한 아이를 나무랐다. 그런데 최초 상황 목격 당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 사이에 다툼이 있을 정도의 긴급상황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분한 풍경이었던 것. 외할머니는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지만 녀석은 “집에 가, 집에 가”하며 할머니 손을 잡아끌 뿐이었다. 할머니는 놀란 가슴을 안고 녀석을 집으로 데려왔다.






아내는 그날 오후 메신저를 통해 이런 상황을 알려줬고,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일단 그런 의혹을 일축했다.






“에이, 설마...”

“엄마가 달려갔을 때, 모두 제자리에 앉아있었대. 그리고 성윤이가 문 여닫고 그런 장난할 애가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볼에 빨간 실핏줄 자국 같은 게 남았어.”

“성윤이는 뭐래? 무슨 일이 있었으면 그 정도 상황은 설명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몰라. 그냥 엄마한테 집에 가자고만 그랬대.”






메신저 대화는 이 정도 선에 중단했다. 찜찜함은 여전했다. 그리고 기사 마감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흑, 성윤이가 ‘김치’ ‘매워’ ‘선생님’ ‘때렸어’ 이러면서 제손으로 빰쳐. 미쳐. 어째.” 

33개월짜리 아이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서둘러 귀가를 재촉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간 어린이집인데... 입소한 지 얼마 됐다고 이런 일이...’

난 기본적으로 교권은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학교에 맡긴 이상, 선생님에게는 아이를 통제할, 부모만큼의 권한과 의무가 있다. 아이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체벌도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교사한테 맞았다고 경찰을 부르는 ‘무개념 부모’는 내게 경멸 대상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머릿속에는 교무실로 찾아가 행패를 부리는 부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에 경멸하던 ‘무개념 부모’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내 심정은 그들을 닮아있었다. 그렇다고 감정대로 할 수는 없는 일. 냉정하게 생각해보았다.






‘너무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다. 만약 우리 추측이 사실이라면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정식사과와 재발방지 보장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면, 진실과 상관 없이 앞으로 성윤이의 어린이집 생활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운 털이 박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어린이집을 옮기면 힘들게 이사 온 보람도 없어지는데...’






이거 참, 아이가 인질도 아니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군가를 붙잡고 상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 전부터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다는 김미영 선배에게 전화를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육아 문제 전문가인 서천석 박사님도 생각났다. 그러나 일단은 아이의 상처를 추스르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녀석을 꼭 안아준 다음에, 녀석의 상태를 보고 대처 방안을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녀석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제기가 필요했다. 






“선생님, 어제 성윤이가 이런 말을 하네요. 부모로서도 참 당황스럽습니다. 아이 맡긴 부모 입장에서도 선생님을 믿고 맡겨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일단 CCTV를 통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만약 저희 추측이 틀렸다면 저희가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멘트까지 생각해놓았다. 






집에 도착하니, 녀석은 엄마와 침대에 앉아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니 녀석은 다행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기분은 좋았다. 아내는 당시 상황을 내게 확인시켜주려는 듯 녀석과 대화를 시작했다.






    “성윤이, 어린이집에서 김치 먹었어? 어땠어?”

    “매웠어. 싫어.”

    “그래서 선생님이 어떻게 했어?”

    “이렇게.”

    녀석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양볼을 찰싹찰싹 쳤다.

    “성윤아, 그러면 선생님 싫어?”

    “아니, 좋아.”

    “내일 어린이집 갈 거야, 안 갈 거야?”

    “갈 거야.” 














b93bd98869575493cd1ddf4d117dfe32. » 그럼에도 녀석은 어린이집에 잘 적응하고 있다.






    휴~ 녀석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 점심반찬으로 깍두기가 나왔는데 아직 매운 맛에 익숙지 못한 녀석이 먹기를 거부하자 사달이 난 것인지... 아내와 난 일단 정식으로 문제제기는 하지 않기로 결정 내렸다.






다음날 아내는 선생님에게 우회적으로라도 우려의 뜻을 전하겠다며 어린이집을 방문했지만 아이들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면담은 불발됐다고 한다.






그날 점심시간. 숟가락질이 서툰 녀석은, 선생님이 밥 먹여줄 때를 기다리며 국물만 두 그릇을 들이켰는데, 아내는 선생님이 성윤이를 일부러 소외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아내는 전날의 사건으로 걱정이 커지고 피해의식까지 생긴 것 같았다. 녀석은 어린이집에서 점심을 먹고 집에 오면, 카스타드 케익 3개를 한 자리에서 먹고 곧바로 잠이 든다는데, 이것도 아내는 어린이집 생활에 따른 스트레스 탓이라고 해석했다.






“가끔 밖에서 보면, 애가 하고 싶은 것도 선생님 눈치 보느라  못  하는 거 같아. 그거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데.”

“그게 뭐가 가슴이 아파. 규율을 배워가는 거지. 난 오히려 흐뭇할 거 같은데?”

“벌써부터 그래야 하는 게 얼마나 불쌍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고 녀석보다 아내가 더 충격이 크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즐거운 어린이집’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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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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