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회를 한다는데... 나 석 달만 하면 안 될까?”
아내의 어조는 완곡했지만 그 속엔 열망이 있었다. 아내는 대학 동아리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그러나 결혼 후 아기엄마가 되고 나서는 클라리넷을 손에서 놓았다. 나도 아내가 악기 다루는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음악’을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인즉, 결혼 전에 활동했던 사회인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회를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해온 것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세 시간 연습을 한다는데, 문제는 매주 일요일 내가 출근을 한다는 점이었다. 둘이 모두 나가버리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된다. 일요일 오후, 성윤이를 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부탁을 드렸다. 한 해 한 해 급격히 감퇴하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일찌감치 ‘손자 양육 포기’를 선언하시고 내내 미안해 하셨던 터. 며느리의 도움 요청을 어머니는 흔쾌히 수락하셨다.
공연 마지막 1주일 전에는 장모님께서 급거 상경하셨다. 1주일 동안 밤늦게까지 이어진 집중연습 기간 동안 장모님은 육아와 가사를 도맡아주셨다. 아내는 한층 안정된 상태에서 연주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도움 아래 석 달이 훌쩍 지나고 드디어 공연이 임박했다. 7월25일 밤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아버지, 어머니, 누나 둘, 자형, 조카 셋, 그리고 장인·장모님이 모였다. 나도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을 하고 이곳에 합류했다. 내겐 연주회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초등학생 미만의 유아는 공연장 출입이 금지돼있으므로, 성윤이와 다섯 살짜리 조카 민지를 공연장 밖에서 무사히 돌보는 게 내 일이었다.
» 녀석은 꽃 사러 가는 길에 자판기에 꽂혔다.
TV로 생중계되는 연주회를 바깥에서도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저 사람들 속에 있다며 열심히 설명해주었지만 세 살짜리 개구쟁이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꾸 안아달라며 장난을 쳐달라고 졸랐다. 진땀이 났다. 꼬맹이들과 ‘일전’을 다짐하며 지하철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비장하게 삼킨 ‘세트 메뉴’의 열량도 얼마 안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공연장 밖에서 TV로 연주회를 감상하기에 두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래서 꼬맹이들을 데리고 아내에게 줄 꽃을 사오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장소를 옮기고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콘서트홀에서 예술의 전당 초입으로 가려면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그 대장정의 길에서 다섯 살짜리 조카 민지가 보여준 행동은 감동적이었다. 카메라에 물통에 과자에 지갑 등등 잡다한 것이 들어있어 제법 무게가 나가는 기저귀 가방을 기꺼이 어깨에 걸머쥐었다. 내가 꽃을 사고 계산을 하는 동안에 녀석이 다른 곳으로 튀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민지였다. 음, 다섯 살만 돼도 ‘쓸모’가 있구나...
» 민지와 성윤이. 녀석은 꽃집 앞에서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아주 잠깐.
꽃집에서 콘서트홀까지는 계단으로 연결돼있었다. 녀석은 계단을 발견하고 흥분했다. 하나, 둘, 셋, 넷... 그 짧은 다리로 계단을 올랐다. 15개 단위로 끊어져 있는 계단을 녀석은 부지런히 올랐다. 중간에 안아달라고 할 법도 한데 포기하지 않고 콘서트홀까지 쉼없이 도달했다. “성윤이 참 잘했어요!”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꽃 한 송이를 사갖고 돌아오니 연주회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얼마 안가 오늘의 주인공 성윤엄마가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들은 박수를 쳤고 성윤이는 엄마에게 축하의 꽃을 안겼다. 양가 부모님, 나, 그리고 민지까지 힘을 보탠 성윤엄마의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성윤아! 5년 뒤에는 우리도 객석에 앉아 편하게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