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잠도 덜 깬 내게 녀석이 속삭인다.
“아빠... 나 어깨가 안 아픈 거 같아.”
어제 녀석은 집안에서 연습투구를 하다가 갑자기 어깨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류현진의 데드암 가능성을 거론하며,
“너, 너무 아프도록 하면 직장인 야구에서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없다”고 겁을 줬다.
게다가 토요일이었던 어제 오전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녀석은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자기 어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결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음냐, 그런데 지금 몇시냐?”
“지금? 7시27분.”
“야, 지금 나가서 야구하면 일요일 늦잠 자는 주민들한테 민폐야. 이따 와.”
그렇게 녀석을 쫓아보냈다.
그러고 다시 왔다. 9시7분이란다. 주섬주섬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먹고 경기장으로 나갔다.
3주만의 9차전이었다.
5월31일 8차전 뒤 2주에 한 번씩 경기를 하기로 했으니 원래는 지난 주에 경기가 열려야 했다.
그러나 지난주말 마침 한겨레 수습기자 종합교양 문제를 출제하러 1박2일 합숙을 떠나야 했다.
일요일인 14일 귀가했지만 그날은 넥센과 kt전을 야구장에서 '직관'하기로 돼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요일 오전에 귀가한 내게 녀석은 9차전을 제안했지만
난 “야, 야구 보러가기 싫어? 9차전 하고 야구 보러 가지 말까” 이렇게 협박하며
한 주를 건너뛸 수 있었다. 나이 든 아빠에게 휴식은 무조건 좋은 거니까.
그렇게 20일 만에 치러진 오늘 9차전. 녀석이 1회초부터 거세게 몰아붙였다.
2아웃 이후 적시타로 1득점. 주자는 1,2루.
몸쪽 낮게 던지려던 공이 약간 가운데로 몰렸고 녀석이 배트를 휘둘렀다.
공은 내 머리를 훌쩍 넘겨 날아갔는데...
그때 지나가던 주민 아저씨가 이 공을 멋지게 잡아줬다.
어안이 벙벙하던 녀석을 향해 아저씨는
“야, 너~ 야구 잘 하는구나~”라며
본인의 호수비보다 녀석의 타격을 칭찬했다.
나는 재빠르게 아웃을 선언했다. 녀석은 쿨하게 인정했다.
“이렇게 행인이 지나가다 잡으면 아웃으로 하는 거야?”
“오케이.”
그렇게 귀인의 도움으로 대량실점의 위기를 벗어난 뒤 1회말,
나는 2득점으로 금세 경기를 뒤집었다.
2회부터 마운드는 빠르게 안정됐다. 20일 만에 등판한 노장의 어깨는 싱싱했다.
오버핸드의 몸쪽 낮은 직구, 쓰리쿼터의 컷패스트볼과 포크볼과 커브,
사이드스로의 슬라이더로 녀석의 방망이를 맘껏 농락했다.
반면 녀석은 경기 운영이 미숙했고 위기관리 능력이 떨어졌다.
3회말 녀석은 선두타자를 진루시키고 갑자기 퀵 모션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투수들은 주자가 생기면 도루를 막기 위해
평소보다 투구 폼을 더 간결하고 빠르게 던지는 데 그게 바로 퀵 모션이다.
평소 선수들의 퀵 모션을 눈여겨보다 그것에 꽂힌 모양이었다.
퀵 모션을 구사하는 녀석의 투구 폼은 정말 빨랐다.
공만 제대로 들어오면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 굉장히 위협적인 투구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제구력.
폼이 흔들리면서 공은 번번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부자 야구에서는 도루가 없으니 그러지 말라고 했건만 녀석은 퀵 모션을 고집했다.
결국 볼넷이 3개나 속출했고 밀어내기로 3실점했다.
녀석은 그러고도 퀵 모션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그 폼으로 삼진을 잡았다.
대단한 똥고집이었다. 3회말이 끝나고 5-1. 마흔살 노장의 불안한 리드.
4회초에는 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몸쪽 낮은 공으로 승부한다는 게 ‘몸에 맞는 공’이 됐다. 그것도 2번이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이번엔 나의 손을 떠난 직구를 녀석이 정확히 맞혔고 공이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스쳐갔다.
악! 최소 2루타가 될 장타성 안타.
그러나 총알 같이 굴러가던 공은 어느새 나타난 아저씨 발 앞에 멈춰섰다.
아까와는 다른 아저씨다. 어이 없어하던 녀석에게 아저씨가 한 말씀 건네셨다.
“이거 안 막으면 니네 아빠 저기 끝까지 뛰어야 하잖니.”
암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요.
그렇게 녀석의 총알타구는 1루타에 그쳤다. 4회초 실점도 1점뿐이었다.
귀인의 도움으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긴 나는 4회말에 2점을 보탰다.
» 재빨리 수비 위치를 잡고 있는 김태규
5회에는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이름은 김태규, 나이는 아홉 살, 녀석의 초등학교 1년 선배.
이사 오고 나서 주말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내 이름을 불러서 깜짝깜짝 놀랐는데
아이들이 부르던 김태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초딩 2학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태규가 녀석의 수비 때 야수를 자청했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역할은 없었다.
5회와 6회, 6개의 아웃카운트를 큰 곡절 없이 잡아냈다. 결국 7-2, 9차전 승리.
귀인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부자 야구 시리즈 사상 첫 퀄리트 스타트에
최소 실점을 기록한 역투였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난 또 녀석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지난번 패배보다는 덜 했지만 녀석이 또 살짝 삐친 듯 바로 들어가려는 걸 잡아세웠다.
5회초에 나타난 태규와 야구놀이를 더 하라고 했다. 내가 이어서 배팅볼 10개도 던져줬다.
2연패의 충격은 말끔히 사라진 듯 했다.
» 노여움이 봄눈 녹듯 풀린 번외경기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어가며 “아빠의 창단 첫 2연승”이라고 기뻐했더니 녀석이 일갈했다.
“좋아하시네. 전 3연승도 했거든요.”
요 녀석 봐라. 앞말이 불손했지만 뒷말이 존댓말이어서 승자의 아량으로 봐줬다.
“아빠가 이겼으니까 실내화도 빨아줄게.”
패배를 비교적 쿨하게 인정한 녀석의 태도에 나는 또 하나의 상을 내렸다.
*6월21일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