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3년 전, 참가자 대다수가 여성이었던 한 모임에서 이 날을 즈음해 각국의 세계여성의 날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모임에 한국인은 나 뿐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대학가에서나 조금 이야기 되는 정도라고 했더니 몇몇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나마도 요즘은 대학 내에 총여학생회가 있어서 학내에서라도 얘기가 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나 역시 세계여성의 날의 유래나 역사는 잘 모른다는 사실에 민망해 했던 기억이 난다.

 

1857년 3월 8일, 뉴욕 의복업계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합당한 급여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여성들은 주 80시간씩 일하면서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았는데, 특히 봉제공장 같은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업에 쓰는 미싱과 실, 각종 부자재에 들어가는 비용 모두 노동자가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악명이 높았던 메사추세츠의 한 면직물 공장은 여성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아침을 먹으면 행동이 굼뜨다며 아침 5시에 여직원들을 출근시켜 일을 시키고 7시에 아침식사 겸 휴식 시간을 주기도 했다. 선배 노동자들의 뒤를 이어 1900년대에 들어 의복 업계 여성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권리 운동이 시작되었고,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규모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이 대규모 여성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훗날 러시아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이 날 3월 8일을 기려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열게 되었다.


세계 여성의 날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문구는 "빵과 장미."

여기서 빵은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임금을, 장미는 여성의 각종 권리를 의미하는데, 이 말은 1912년 메사추세츠에서 있었던 대규모 여성노동자 파업에서 유래했다. 면직물 공업으로 유명한 한 도시의 당시 노동자 구성은 대부분 이민여성과 14세 미만의 아동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하루 종일 일해도 빵 한 덩이 먹기 힘든 빈곤과 위험한 작업 환경에 분개한 여성들이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파업 시위대가 들고 있던 손팻말에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켄 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로 더 널리 알려진 이 <빵과 장미>라는 문구는 사실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에서 나온 것인데, 이 시의 한 대목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As we come marching, marching, we battle too for men,
For they are women's children, and we mother them again.
Our lives shall not be sweated from birth until life closes;
Hearts starve as well as bodies; give us bread, but give us roses!

"우리가 행진, 또 행진할 땐 남자들을 위해서도 싸우네.
남자들은 우리의 자식이고, 우린 다시 그들을 돌보기 때문이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린 착취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고 있다.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도 달라!"

 

'

 

당시 여성들이 파업을 할 때, 남성 중심의 노동 운동 진영에서는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다국적 이주민 노동자들로 이뤄진 여성 노동자 파업이 성공할 리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의 싸움은 남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모든 남성들은 여성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으면, 여성에게 합당한 임금이 주어지지 않으면, 여성에게 사람답게 살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결국 그 대가는 우리 모두가 지게 된다. 남성도 여성의 자식이고, 우리 모두는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에 여성의 돌봄을 받으며 살기 때문이다.


마트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실화를 담은 한국 영화 <카트>에도 100여 년 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 곳의 여성 노동자 대부분은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는 엄마요 할머니였다. 앉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청소용구함 구석에 쪼그려 김밥 한 줄로 밥을 때우며 교대 근무를 하는 마트 노동자들. 대학 때 잠깐 빵집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 있는 나이기에, 또 학원 강사로 일하며 비슷한 일을 숱하게 겪어본 나이기에, 그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 마트 노동자 뿐인가, 청소 노동자, 학습지 교사, 보육 교사, 방과후 돌보미, 요양보호사 등등 그 많은 '돌봄 노동'에는 열악한 근무 환경, 낮은 임금을 견뎌가며 일해야 하는 여성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 있다. 반찬값 밖에 안 되는 임금을 주고 있으면서 '겨우 반찬값이나 벌러 나온다'며 핀잔해대는, 그 돈 쪼개고  쪼개 월세 내고 공과금 내고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작 여성 본인은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게 하는 곳이 지금 우리 사회다.


여성들의 땀과 눈물이 꼭 노동 현장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에게 다 내어주고 남은 것이 없는 맨 몸을 찬 바닥에 눕혀야 했던 밀양 할매들은 어떤가. 아이들을 찬 바다에 넣어두고 1년이나 눈물로 살아온 엄마들은 어떤가. 직장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친정 엄마 손을 빌려야 하는, 그래서 어느 베이비트리 독자분이 "신 마마우먼"이라고 이름 붙인 우리 세대 직장여성들은 또 어떤가.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도, 보내지 않는 것도 쉬운 선택이 아닌 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연일 이어지는 사고와 만연한 폭력, 끝없는 경쟁에 아이들을 밀어넣고 있는 엄마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서 엄마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엄마들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다시 장미를 요구해야 할 때다. 내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우리 모두 쇼핑 카트에 빵 한 덩이와 장미 꽃다발을 싣고 거리를 행진해보면 어떨까. 아이를 카트에 싣고, 남편과 손 맞잡고, 여성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1년에 하루 쯤 우리 모두가 여성을 위한 축제의 날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 시간에도 계산대 앞에서 바삐 손놀리고 있을, <카트>의 여성노동자들을 대신해, 그들과 함께 소리높이는 우리 모습을 상상해본다. 


여성들에게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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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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