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가 모래성을 가져가도 울지 않을 만큼 아이들은 어느새 쑥쑥 자랐다.
어린시절 나의 주양육자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더운 여름날. 종종 할 일이 없을 때면 나는 장판 위를 뒹굴거리면서 곳곳의 검게 눌어붙은 동그라미를 손으로 후벼파며 놀았다. 검은 동그라미들은 할머니가 실수로 바닥에 담뱃재를 떨어뜨리며 생긴 곰보자국들이다.
꽤 많은 검은 동그라미들을 파면서 노는 게, 생각보다는 꽤 재밌다. 할머니는 담뱃자국 말고도 나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동네 굿판에 가서는 언제나 알록달록한 과자를 집어왔다. 할머니가 치맛속을 들추고, 낡은 손수건에 쌓인 과자들을 꺼내길 기다리던 그 순간의 설렘은 지금도 굿판의 과자들처럼 선명하고 알록달록하게 남아있다.
내 기억 속 할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도록 축 늘어져있었다. 기억 속에서는 거의 배 중간쯤까진 내려왔던 것도 같다. 여름날 지나치게 헐렁한 모시 저고리 사이로 나는 가끔 손을 불쑥 넣어 할머니의 가슴을 만지면서 놀기도 했고, 할머니는 언제나 말 없이 가슴을 내주었다.
어떤 날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아마 6살 정도였던 것 같다. 언제나 처럼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느긋하게 가슴을 만지며 놀고있었다. 할머니는 내 이마를 쓱쓱 쓰다듬어주면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굵은 주름이 겹겹이 있었던, 무척이나 거칠었던 할머니의 손은 등긁개처럼 시원한 느낌이 드는 그런 손이었다.
할머니가 문득 말했다.
"숙아, 너는 할머니 죽으면 어떡할래?"
태어나서부터 늘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6살. 난 한번도 할머니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없다는 것은. 그냥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별다른 고민없이 난 말했다,
"나? 난 할머니가 죽으면 따라 죽을 거야"
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환한 주름으로 가득찼다. 어이가 없는 듯, 그러나 어찌보면 조금은 기쁜 듯 할머니는 웃고 있었다.
"니가 같이 죽는다고? 허허허. 그럼 안되지 니는 오래오래 살아야지"
"싫어, 난 할머니 없으면 싫으니까 그냥 같이 죽을꺼야"
나의 투정에 할머니는 그냥 빙글빙글 웃었다. 그렇지만, 당시엔 그냥 내 마음이 그랬고, 진심이었다. 그 뒤로 할머니는 종종 이웃사람들한테 웃으며 내 이야기를 했다. (물론 엄마는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 질색하셨다)
"글쎄, 야가 내가 죽으면 같이 죽는다고 하잖소."
사람들은 손녀가 할머니를 얼마나 따르면 그런 소리를 하겠냐며 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별다른 생각없이 뱉은 나의 그 말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당시엔 그저 아리송한 무엇이었다. 내가 그렇게 기특한 말을 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괜히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내가 9살 되던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당연히 6살 꼬마의 부질없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킬 수도 없었던 약속이었고, 말했다는 것마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약속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6살 꼬마는 10살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됐고.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는 거의 30년이 훌쩍 넘었다.
어느날 저녁이었다.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고, 나는 대충 뒹굴거리다가 침대와 한몸이 되어 누워있었다. 아들이 자신의 레고 조립을 도와달라, 책을 찾아달라 몇몇 요구를 했지만, '우이독경' 권법으로 무시했다.
"엄마, 너무 피곤하다. 한발짝도 못 움직이겠다"
그러자 아들이 쪼로록 안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많이 피곤해?"
"응, 양치하러 갈 힘도 없어"
침대에 널부러져 있던 나를 내려다 보던 아들의 눈빛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난 먼저 선수쳤다.
"왜, 엄마가 뻥치는 것 같냐? 진짜 힘들어야. 이거봐 발가락까지 늘어진거 봐"
평소에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그러면서 휴대폰은 어찌 그리 잘보냐, 별로 피곤해보이지 않는다면서 타박했던 아들 녀석이었기에 먼저 방어 기술을 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말했다.
"아니, 내가 엄마 업어주고 싶어서. 내가 크면 엄마 피곤할 때마다 업어줄게. 업어서 화장실까지 데려다 줄게"
나는 순간, 멈칫했다. 정말? 뭔가 훌쩍 커버린 듯한 아들의 말에 나는 아이를 말없이 꼭 안았다. 그러자 아들은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엄마 뱃살이 많아서 쉽지는 않겠지만 말야 킥킥"
우리의 감동적인 장면은 결국 뱃살 논쟁으로 번지면서 나와 아들의 추격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래도 난 그날 아들의 그 약속이 너무 좋았다.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받은 약속이었던 것 같다.
"내가 크면"의 약속.
내가 피곤할 때마다 아이가 나를 업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의 "내가 크면" 약속도 다른 수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그런 약속이었다. (내 남편의 경우에는 어머님께 롤스로이스를 사드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어머님은 종종 그 약속은 언제 지켜지는 거냐며 농담으로 묻곤 하신다. 설마 어머님 농담이 아닌 건 아니시겠.......)
그러나, 나는 부질없는 그 약속이 너무 좋았다. 사랑을 마냥 받는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쑥쑥 커서 나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그런 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천천히 밀물처럼 내 곁으로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 때 아이였던 나는 알고 있다.
부질없을지는 몰라도, 약속을 하는 그 순간, 아이의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을. 부모들 역시 그걸 알기에, 그 부질없는 약속에 기대 또 힘을 얻는 게 아닐까?
언젠가 나를 업어주겠다는 굳센 다짐을 하는 아들의 결의에 찬 표정은 그래서 내게 치유제다. 무언가 나를 위해 해주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자랐다는 그 사실. 한없이 가녀리고 작았던 종아리에 제법 든든한 근육이 붙은 것을 볼 때 느껴지는 안도감같은 것이, 내가 아이를 이만큼 키워냈구나라는 대견함같은 것이, 그런 약속들을 받을 때면 문득 문득 든다.
부질없는 약속들이 그래서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