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개개인의 특성에 따른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 아동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교육법을 중시한 마리아 몬테소리가 처음 연 아동 교육시설은 로마 빈민가 공동 주택단지에 세워진,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자녀를 위한 곳이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아는 '몬테소리 유치원'이나 몬테소리 교구들은 어떤가?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가의 교육 시설/자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그 본질과 유래, 목적을 벗어나 변질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는 그대로 교육의 양극화를 낳아, 한쪽에서는 '부를
대물림하는 교육'이, 다른 한쪽에서는 '가난을 대물림하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선진국' 미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그렇게
상찬하고 한국을 따르고 싶어한다는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희망의 불꽃>을 읽으며 곰곰 생각해보니 한국에는 미국이
부러워 할 만한, 미국에는 없는 것들이 몇 있다. 첫째는
높은 교육열, 둘째는 안정적이고 균등한 교사 수급, 셋째는
중앙에서 관리하는 공통적인 교육과정이다.
미국에서 '교육열'은 대도시의
소수 상류층에서 특히 높을 뿐, 교육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분위기가 한국만큼 널리 퍼져있지는 않다. 내가 사는 이 곳, 이 대학에 오는 여학생들의 많은 수가 '미래가 보장된, 잘 나가는 공대생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대학에 다닌다고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이런 여학생들을 두고 'Mrs. degree'를 따러 왔다고 부른다. 누군가의 아내(Mrs.)가 되기 위해 학교에 다닌다는 뜻) 그리고 이 동네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친구의 전언에 따르면, 시골 지역의 아이들일 수록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이
그리 크지 않은 분위기라고 한다. 한국에선 지방, 시골일수록 '인서울' '대학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고, 그래야 '성공한다'는 인식이 높은 반면 이 곳은 오히려 자기가 나고 자란 곳에서 패밀리 비즈니스(가족
중심으로 운영하는 가게/서비스 업)를 꾸리거나 하면서 평생
그 주(state)를 벗어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미국 교육계에서는 매년 40만 개의 공석이 발생할 정도로 교사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다. 미국 시스템에서 학교 재정의 많은 부분은 해당 동네의 주민들이 내는 '주민세'로 충당되는데, 그러다보니
부유한 동네일수록 학교 재정이 넉넉해 교사 수급도 교육 환경도 안정적이고 그렇지 않을수록 교육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 이민 인구가 많거나 저소득 인구가 많은 지역은 학교 재정도 업무 환경도 교사에 대한 처우도 좋지 않아서 이직률이
높고, 그러다 보니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더라도 교사로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질 낮은 교육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 그것도 사회적/경제적/인종적 약자에 속하는 학생들이 받게 되는데, 학업중도포기 비율이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한다. 2011년 기준 인종별 학업포기 비율을 보면 백인 5.2% / 흑인 9.3% / 중남미계열 17.6% / 네이티브 (미국 원주민) 13.2% 로 나타나고 있고, 소득별로는 연간 가계소득이
10만불 이상인 계층에서는 학업포기 비율이 3%
미만이지만 연간 가계소득이 2만 5천불 미만인
계층에서는 학업포기 비율이 15%가 넘는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미국에는 국가 전체적으로 통합된 교육과정/기준이 없다. 주별로, 시별로 혹은 학군별로 교육과정과 평가 기준이 저마다 달라
빈부격차에 따라, 지역의 정치적 색채나 종교적 영향력에 따라
교과서도, 수업 내용도, 시험 내용과 기준도 모두 제각각이다. 오바마 정부 들어 이에 따른 교육 불평등 문제와 낮은 학업성취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커먼 코어'(Common Core) 커리큘럼 이라는 교육개혁을 시도하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 정치적인 이유로 이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만만찮아 실효성이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도 정치적/종교적으로 꽤나
보수적이어서 약간의 ‘개혁’도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강한데, 아니나 다를까 이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커먼 코어 커리큘럼 채택에도 기를 쓰고 반대하고 나선다. 연방정부의 영향력이 커지면 주 정부의 자율성을 침해하게 되고, 그것은
곧 ‘반(反) 미국적인’ 처사라는 것이 보수층의 주장인데, 그들에게 빈부 격차, 그리고 그에 따른 교육의 질 격차는 개인의 삶의 방식/선택/능력에 따른 문제이지 사회가, 국가가 해소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가능한 거라고 생각된다.
물론 ‘공통’교육과정과 잦은
학업성취도 평가를 중심으로 한 교육을 받고 자란 한국인으로서 이런 식의 제도가 불러올 문제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극단적인 교육 양극화가 계속된다면 미국의 사회적 취약계층은 점점 더 빈곤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 뻔하다. 조너선 코졸이 지적한 것처럼, 빈곤
지역에서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의 경우 운 좋게 괜찮은 중/고등학교로 진학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을 따라갈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중/고등 교육의 장이 그 아이들에겐 ‘킬링 필드’(Killing field), 죽음의 장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미국에는 없는 저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음에도 교육 양극화 또한 함께 갖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너무 높은’ 교육열, ‘너무 안정적이기만 한’ 교사직,
‘너무 일률적인 학업 성취 기준’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대한 적성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대학엘 가야만 한다는, 어쩌면 ‘환상’이나 ‘억지’일지도 모를
그런 관념. 대학엘 가야 좀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대학 졸업자들의 실업률도
높은 현실, 안정적이다 못해 안이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개혁이나 교육 불평등 문제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
수많은 현장 교사들, ‘의식 있는 교사’였다가는 빨갱이 소리
듣기 십상인 상황. 학생 개개인의 흥미, 적성, 학습 속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똑 같은 기준을 들이대며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취도를 요구하는 사회.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면 패배자 취급 당하는 사회. 그곳이
오바마가 그렇게도 상찬한다는 한국의 교육 현장이다.
희망? 조너선 코졸의 책에서 ‘희망’은 잿더미 속에 남은 작은 불씨 하나였다. 그 불씨는 바로 배움에
목마른 채로 허덕이다 운 좋게 재 속에서 건져 올려진 그 아이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인, 발랄하고 당찬 소녀 파인애플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큰’ 문제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문제들을 찾아 맞서 싸워야 한다”고. 그리고 그 일은 우리 세대를 넘어 ‘횃불을 들고 나아갈’ 다음 세대, 어린 세대를 위한 일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그 일이 시작될 수 있는 ‘사소한 지점’은 나의 삶이, 내 자식의 삶이 누군가의 삶을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 돈 들이고 내 능력(지식, 자원) 들여 내 자식 공부시키겠다는데 그게 왜 문제야?” 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 적성도 흥미도 없는 공부 억지로 시키려고
내 자식 쥐 잡듯이 잡지 않는 것.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 책이
없어서, 혹은 모르는 걸 가르쳐 줄 엄마 아빠 과외 교사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내 주변에 있진
않은지 눈여겨 보는 것. 동네 저소득 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공부방에 우리 애 안 보는 책도 좀 넣어주고
가르치는 일도 분담해 보는 것. 그러면서 좀 더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청원도 넣고 제안도 하고 피켓
들고 나가도 보는 것. 우리 모두가 한번 그렇게 살아보면, 세상은
의외로 빨리 변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