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애를 너무 어른 취급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한 소리를 듣고 나면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그러게, 아직 만 세 돌도 안 된 아기인데……”

또래에 비해 늦었던 말문도 트였고, 말은 늦어도 말귀는 아주 귀신이다. 밥 숟가락질도 혼자 하려고 들고, 신발도 혼자 신고, 이도 스스로 닦겠단다. 정숙(?)을 요하는 곳에서는 조용해야 하는 줄 안다.(대신 끝나면 참았던 소리를 몇 배는 더 쏟아낸다. 부쩍 커가는 모습이 보이다 보니 애를 애로 생각 안 할 때가 많다. 지난 번 글에서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위로’의 맛을 본 이후로, 알게 모르게 아이의 품을 더 파고들며 기대곤 한다. 애는 어른 행세를 하고, 어른이 도로 애가 되는 꼴이랄까? 둘다 애어른이다.

d602147595e181ab4d57449e4ab9d7d4.며칠 전에도 그랬다. 음식을 하다가 초고추장 그릇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놓쳤다기보단 거의 날리는 수준이었다!). 매실청과 참기름을 아낌없이 넣고 만들었는데, 이게 대형사고람! 유난히 붉은 고추장이 뽀얀 싱크대와 바닥으로 사방팔방 튀어나간 모습은 무슨 전위예술처럼 파괴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잡을 뻔 했다가 놓친 게 더 화근이 되었다.


원래도 뭘 잘 떨어뜨리는데, 출산 후에 훨씬 더 심해졌다. 밥을 앉히려다가 밥솥을 놓친 적도 있고, 김치통을 꺼내다 엎은 것도 여러 번이다. 엄마가 직접 달여 보낸 녹용도 엎어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이렇게 한 번 뭘 엎으면, 특히 주워담을 수 없을 때 너무 고통스럽다. 일단 아깝기도 하고, 치울 생각에 앞이 깜깜하고, 뭔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심할 땐 '나 왜 이 모양, 이 꼴일까?'라는 자학의 순간도 있다. 남편은 이게 혹시 무슨 병인가? 싶어 병원에 가보자고 한다.(이게 정말 병인가요? 아니면 그냥 칠칠치 못한 건가요? 흑흑;;;)


치울 엄두도 못 내고 주저앉아서 애어른처럼 훌쩍거렸다. 너무 속상했다. 저 만치서 놀던 딸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왔다. 아, 안돼! 초토화된 주방에 발을 들여놓고 문지르기 시작하면 더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아이에게 사정했다.

“잠깐만!!! 여기 들어오면 안 되거든. 너까지 그러면...엄마, 정말 힘들거든.”


말귀가 귀신인 우리딸, 알아들은 것일까? 주방으로 들여놓으려던 발을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아이가 양보한 틈을 타서 재빨리 급한 것만 처리했다. 소율이가 다가왔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울지마, 엄마…"


e0dc71222f2c70b8b29d5e822a2b484f.물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ㅋㅋ 그냥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 게 다 였는데, 나는 그렇게 들은 것 같다.  내가 어른애가 되니, 아이가 애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멀쩡하게 어른 같을 때가 많다보니, 머지않아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친구같은 딸'이 될 것 같은 착각도 한다. 이렇게 허황된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을 땐 꼭 한 번씩 크게 뒤통수를 친다. 얼마 전엔 싱크대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설거지 놀이를 하길래 그냥 놔두었다가 주방이 물바다가 되었고, 비온 후 진흙탕에서 놀길래 놔두었다가 자동차가 머드팩을 당하고 모래알에 긁히는 사건도 있었다. 아그야...겨우 2년 지난 새차거든. 또 훌쩍;;;


어제도 건수 올렸다. 내가 저녁에 드는 수업시간이었다. 처음엔 옆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며 잘 놀았다. 문제는 강의가 약간 길어지면서부터였다. 참을 만큼 참았는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강단 쪽으로 마구 달려가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기도 했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어 복도로 데리고 나갔더니, 저항의 의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빨리 달래서 들어가야지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알아차리고 더 보란듯이 소란을 피우는 거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그냥  조기철수하기로 했다.  '그래, 욕심이 과했어. 애 데리고 무슨 강의......' (근데, 애 엄마도 공부 좀 할 수 있게, 베이비시터 지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보궐선거에 보육정책으로 강추!)


애 취급하면, '이제 좀 컸거든!' 외치는 것 같다가, 성숙함을 기대하면 '나는 아직 애거든요!’ 하며 나를 주저앉힌다. 조금 큰 것 같으면, 아이에 대한 기대는 저만큼 앞서 달려간다. 빨리 커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기대심리가 널을 뛰고, 그 기대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급실망하게 된다. 가만 보니 모든 화는 앞서가는 기대심리에서 오는 것 같다. 애는 애처럼 굴면 당연한 거고, 애가 어른 노릇하면 귀엽고 기특한 거다. 어른이 애마냥 엎어지고 자빠지고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주위 사람들 재밌게 해줄 에피소드 하나 추가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자학은 좀 많이 갔다. 애나 어른이나 애어른인 요즘, 그냥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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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30대 중반, 뒤늦게 남편을 만났다. 덜컥 생긴 아기 덕분에 근사한 연애와 결혼식은 건너뛰고, 아이 아빠와 전격 육아공동체를 결성해 살고 있다. '부자 아빠=좋은 아빠', '육아=돈'이 되어버린 세상에 쥐뿔도 없으면서 아이를 만났고, 어쩔 수 없이 '돈 없이 아기 키우는 신세'가 되었다. 처음엔 돈이 없어 선택한 가난한 육아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경험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더불어 몸의 본능적인 감각에 어렴풋이 눈을 뜨 고 있으며, 지구에 민폐를 덜 끼치는 생활, 마을공동체에 재미를 들여가고 있는 중이다.
이메일 : tomato_@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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