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은 마흔여섯 번째 내 생일이다.
결혼한지 14년이 흐르고 보니 내 생일을 가족이 기억하고 있었나 아닌가
이런것에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진즉 깨달았다.
9월 달력이 걸리자마자 야무진 두 딸이 큼직하게 29일에 엄마 생일이라고
표시를 해 두고 기다려온 덕에 가족 모두가 하루 하루 날짜를 헤아리며
같이 기다려 오게 되었다.
아이들이야 생일덕분에 얻어 먹을 맛난 음식을 기대했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내게 안겨줄 축하 편지를 기다리는 행복이 있었다.
남편에게 혹 받게될 축하 인사나, 감동... 도 물론 기대하긴 했지만..^^
딸들은 며칠전부터 생일선물을 만든다는 둥, 축하 카드를 이쁘게
꾸민다는 둥 뭔가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애쓰는 기미들이
보이는데 열네살 아들은 도통 무심한 듯 보였다.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양은냄비 기질을 가진 나는 슬슬
조바심이 나서 아들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아들.. 엄마 생일에 가장 기다리는 것이 축하 편지인거.. 알지?"
"글쎄요"
"글쎄라니.. 엄마는 선물보다도 편지가 더 좋다구. 그러니까
정성 좀 들여봐"
"훗.. 전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전 미움받을
용기가 있다구요. 그러니까 기대하지 마세요"
으이구.. 그 좋은 책은 도대체 뭘로 읽은거냐.. 싶었지만
그래도 기대는 접지 않았다.
생일 하루 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녀석을 역에서 태워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또 못참고 물어 보았다.
"내일이 생일인데, 편지는 다 준비한거야?"
"음... 오늘부터 하루에 한자씩 정성껏 쓰면.. 한 40년 후에는
받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흥, 40년 후에 엄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도 있어"
"그럼 추모편지가 되겠죠, 뭐.."
"야!!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살아있을때 잘 해 주시지"
"그럼, 기다려 보시던가요"
아유, 약올라라.. 이 유들유들한 녀석, 속마음을 당췌 모르겠네.
마침내 생일날, 남편까지 퇴근하기를 기다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생일 파티를 했다. 두 딸은 저녁 준비할때부터 방에 들어가 꼼짝을
안 하며 뭔가 준비하는 모습이더니 앙증맞게 꾸며진 카드 봉투를
들고 나타나 읽어 주었다.
사랑하고 축하하고, 엄마가 너무 좋다는 아주 귀여운 글들이 가득했다.
흐믓하게 듣고 나서 아들을 쳐다 보았다.
"넌,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럴리가요. 방에 다 준비 해 뒀죠" 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잘 접은
편지 한통을 들고 나왔다.
그렇게 의뭉스럽게 굴더니만 쓰긴 썼구만.. 내심 기대하며 폈다가
깜짝 놀랐다. 작은 편지지 한 가득 글이 써 있는 것이다.
- 엄마에게..
엄마..46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제가 그동안 속도 많이 썩이고 화도 많이 내고
잘못도 많이 했는데, 항상 용서해 주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먼저 화해하자고 하셔서 제가 더 미안해지네요.
사실 엄마는 글씨체와 성질 빼면 더할나위없는
최고의 엄만데 제가 제 생각만 해서 그런가 봐요.
앞으로는 더 사이좋게 지내요.
그리고 저하고 동생들한테 잘해주세요. (더)
물론 아빠한테두요.
또, 화내는 일 없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지내셔야 되요.
학부모 회장도 하시고 정말 바쁘실텐데 그런데도
항상 우리한테 최선을 다 하시는것 같아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추신 :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목 나가요) -
읽다가 웃음이 나왔고, 이윽고는 눈물이 나왔다.
아이고, 이 녀석...
이렇게 엄마를 감동시킬꺼면서 그동안 참말로 애간장을 태웠구만..
자식.. 밀당의 고수야, 고수..
나는 다 읽은 편지를 접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필규야.. 이리 와서 엄마 좀 안아줘"
주방에서 물을 마시던 필규는 훗 하며 다가와 나를 안았다.
"역시 또 우시네. 제가 이럴줄 알았어요"
"힝.. 이렇게 써줄거면서 뻗대기는... 언제 이렇게 컸나.. 우리 아들..."
아들은 내 무릎에 앉아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니가 얼마나 무거운데 무릎에 앉아, 아이고 아파라.."
"표준체중보다 10키로는 덜 나간다고요, 참으세요" 아들은 빙글거렸다.
"엄마를 죽이고 멀리 달아나겠다고 소리지르던 여섯살 필규는 어디갔을까.."
"엄마를 죽이고 달아나봤자 금방 잡힐걸요? 하하"
"2층에서 떨어지면 목이 부러질까요? 하며 대들던 아홉살 필규는 또 어디 갔을까.."
"2층에서 떨어져봤자 중력의 작용으로 발이 먼저 땅에 닿을걸요. 목은 안 부러져요"
"흥.. 내 앞에서 칼로 죽어버리겠다고 씽크대로 칼을 찾으러 가던 어린 필규는
또 어디에 있나. 언제 이렇게 의젓하게 큰 거니"
"히히. 우리집에 그정도로 날카로운 칼도 없는데..."
"너 정말 엄마랑 막장 드라마 수도없이 쓴거 다 기억이나 하냐?
내가 너의 만행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그따위 만행들은 잊어 주시지요...."
"엄마 글 속에 다 있지롱..히히"
"그 글이 이 지상에 발표되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겁니다, 흐흐"
"이미 다 나와 있어. 크크
그런데도 이렇게 잘 커서 엄마 사랑해주고 아껴주니, 정말 꿈만 같다"
아들은 빙긋 웃으며 제 얼굴을 내 뺨에 비벼댔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내가 아들을 다 망쳐 놓은 걸까..
수없이 가슴을 치며 울고, 불안해하고, 아득해 하던 날들이 분명 있었는데
아들은 이렇게 늠름하게 자라나 벌써 엄마보다 더 커서 가끔은 남자처럼
푸근하게 엄마를 꼭 안아줄 줄도 알게 되었으니..
아.. 아들하고 보낸 그 시간들 속에 귀한것들만 잘 남아서 우리를 지켜주었구나..
새삼 감격스러웠다.
아들의 편지는 잘 접어서 늘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끼워 두었다.
살다가 또 기운 없을때 꺼내서 보면 힘이 쑥 날것만 같다.
올해는 생일이 평일이라 밥도, 국도, 요리도 모두 내가 다 준비했지만
출장갔던 남편은 따스한 사랑의 말을 블로그에 올려 나를 감동시켰고
손끝이 야무진 두 딸들은 이쁜 카드와 편지를 내게 안겨 주었고
아들까지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편지를 주었으니 세상을 다 가진것 같다.
열심히, 열심히 잘 살아야지..
이렇게 큰 사랑 받고 있으니 내가 준 사랑들이 이렇게 벌써 내게
돌아와 나를 채우고 있으니 감사하게, 고맙게 잘 살아야지.. 마음먹었다.
고마워 아들..
그리고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