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2.jpg

 

(모자로 시작되었던 제 사연에 대해 좀처럼 말이 없는 남편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 글은 남편이 직접 써서 메일로 보내온 것을 거의 수정없이 올린 것입니다.
부부라는 관계로 함께 살지만 서로를 제대로 알아가고 이해한다는 것은 평생에 걸친 일이겠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진심을 보여준 남편의 용기와, 정성, 고맙습니다.)

얼마 전 모자 사건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신순화의 남편입니다.
 
변명 아닌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막은 이런 겁니다.
베이비트리 기자님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모자건이라고....
모자에 얽힌 글에 대한 다른 생각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어떠냐고 물으시길래

물론 다른 생각이 있고, 그 글 때문에 기분이 안좋았다고 했습니다.
 
각설하고 그때의 상황을 되새겨 보면,
퇴근하고 늦은 저녁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달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모자를 샀다는 것과 어느 정도 비용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내의 구매 성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또 어떤 모자를 사서 얼마나 갈까, 무릇 그날의 대화에서 궁금해 하던 거를 물어봐야지

하며 늦은 귀가를 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밥상에 앉은 후 얼마 가지 않아 문제의 그 질문들을 쏟아놓았습니다.
 
"여보, 오늘 내가 모자 하나 샀거든? 한 번 볼래?"
"아니.."(아주 냉정하게 응. 어떤 거기에 가전제품 한 대 값이냐?)
"아니라고? 마누라가 무슨 모자 샀는지 안 궁금해?"
"."(궁금해. 보자)
"왜 안 궁금해. 어디서 샀는지, 어떤 걸 샀는지, 잘 어울리는지 당신이 봐주고 물어봐야지 왜 안 궁금해?"
"알아서 샀겠지 뭐...“(어 이게 아닌데... 잘 어울려. 예뻐. 앞으로 좀 그렇게 이쁘게하고 다녀라,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아재개그에 워낙 반응이 싸해 수습이 되지 않을 지경까지 가게 되었지요.

물론 익숙치 않은 표현에 본심이 전도 되었지만 원래의 의도대로 재빨리 수습했어야하는 아쉬움은 많이 있습니다.)
 
14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아내의 쇼핑에 동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발가게든 옷가게든 들렀을 때 나의 의사를 물어보긴 했어도 내 의사에 마누라가 동의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이거 어때?”
. 아니야. 내겐 안 어울려.
그럼 이건?”
아니. 너무 비싸.
,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그럼, 알아서 하셔로 대부분 끝나버렸습니다.
그 이후 아내의 구매에 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제 구매 성향은 아내와 전혀 다릅니다.
필요하다 싶은 것은 부지런히 아이쇼핑과 폭풍검색을 통해 좀 비싸더라도 그 사양의 상품 중 제일 좋은 것으로 선택합니다. 그래야지 오래 쓸 수 있으며, 유행에도 덜 민감하다는 생각입니다. 결혼 전 샀던 셔츠도 얼마 전까지 입고 다녔으니깐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답답합니다.
제대로 된 것도 못 사고, 망설이다 엉뚱한 것을 산 뒤 후회하고 자주 그랬습니다.
저는 늘 아내가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좋은 것을 선물해 주고 싶기도 하구요.

언젠가 크XX 샌들을 선물했지만

맘에 안 든다고 단칼에 반품하는 것을 보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집사람을 위한 구매 대행을 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충격으로 말입니다.
아내는 이 일을 기억조차 못 하더군요.
그 날도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바로 정색을 하는 바람에 결국 눈물 콧물로 서로 감정만 상해버린 결말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 자세한 과정은 옮겨지지도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구와 상의하고 얘기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늘 고달프고 바쁘셨던 아버지와 경제의 일부분을 짊어지셨던 어머니였기에

상의고 요구고 할 겨를이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육성회비도 그렇고 연필도 그렇고 독촉에 독촉을 해도 내가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다 어렵게 얘기했고, 연필은 최대한 마지막까지 썼습니다. 그 시절 누구나가 그랬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회사문제건 밖에서의 문제든 집에는 일절 갖고 가지 않습니다.
내가 안고 가야할 일이기에 누구에게 그 애환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장으로서 견뎌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초 회사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었습니다.

어려움은 몇 년 전부터 있었지만 그동안 조금씩 구조조정을 실행하던 차에 이번엔 대규모였습니다. 구조조정에 대한 방안의 발표는 올해였지만

작년에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나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발표난 명예퇴직 조건은 회사 창립 이래 가장 좋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IMF때 부도를 겪었었고, 당시 구조조정 시 노동자 대표의 한사람으로서 나섰던 난 더 고민스런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몇 년 못할 건데 이참에...’
뭐든 못할까. 아직 건장한 몸뚱어리가 있는 데....’

이런 생각을 하며 수많은 밤, 잠을 설쳤습니다.

지금은 언제 그랬나싶게 별을 보고 출근해서 별을 보고 퇴근하고 있지만 실직에 대한 그림자는

항상 같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같이하는 그림자를 집에까지는 데려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했듯 집앞까지만 간직합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그랬습니다.
당신도 하고 싶은 거 해보면 어때? 취미 같은 거 말이야라고요.
결국 지금은 가정에 충실하고 나중에란 결론으로 끝맺고 말았지만 늘 고민스런 부분입니다.
나 또한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단지 그런 것을 얘기하지 않고 혼자 고민할 뿐입니다.
 
어제 윤정이 숙제를 도와주는데 윤정이가 울기 시작합니다.
왜 정신차리지 않아. 그러니 자꾸 틀리잖아.
아빠. 수학은 어려워요.
그렇게 생각하니 싫어지고, 하기 싫어지고, 그러니까 틀리는 거잖아. 매일 집에와서 한 번 해보고 그래야 늘지. 영어와 수학은 매일매일 하지 않으면 늘지 않어. 앞으로 학교 갔다오면 조금씩 해.
윤정인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습니다.
아빠. 내일부터 학교 갔다오면 공부할게요. 약속하며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숙제를 마치고 나오며 아내에게 한마디했습니다.
애 공부 좀 봐줘라라는 말에 아내는 곧 새침한 눈빛을 하더군요.
잠자리에서 윤정이는
엄마가 학부모회장이 된 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뭐가 좋은 거고 나쁜 건 뭔데?
음 회장이 된 거는 엄마가 대표가 된 거니까 좋은데요, 나쁜 거는 너무 바쁜 거예요.
엄마가 너무 바쁘니까 우릴 잘 돌봐주지 못할 때 속상해요. 숙제도 혼자서 하라 하고...”
그때 집사람이 그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언제 숙제 안 봐줬니?”
저번에 내가 부탁하니 너 혼자서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 때 한 번이지. 숙제는 너 혼자 하는 게 맞고 엄마는 확인만 해주는 거잖아라며 쏘아 부쳤습니다. 잠자리에서 윤정이를 꼭 안아주며 내일부터 조금씩하는 걸로, 필규는 불러 옆에 눕게 하고 짜증내지 않을 수 있는 범위에서 잘 돌봐주라는 당부로 끝냈지만, 이따금 아내가 애들한테 말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들곤 합니다. 피곤하고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꼭 저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방식도 아내를 화나게 할 때가 많으니 이런 말은 참 서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다보니 말을 못하고 혼자 삭히게 되지요. 다 자기 모습은 잘 못 보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결혼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지론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군소리 없이 따라 주는 것이 최선의 외조라고 말입니다.

돌아가신 어미니께서 늘 하신 말씀하신 것도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늘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손해 볼 것이 별로 없단다. 네 아버지도 내 말 잘 들었으면 아마 지금 재벌소리 들으며 살았을 거다라고요.
이 말씀에 대해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어려웠던 시절 모든 것을 헤쳐나온 것도 어머니의 힘이었고

지금의 환경도 어머니가 마련해 두고 가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이사를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편한 아파트를 놔두고 낡은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는 아내의 말을 극구 반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흔쾌히 동의해준 것도 아내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까이 것 무엇이 문제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달프긴 합니다. 집관리와 풀과 벌레들, 심지어 뱀까지... 그리고 갖가지 씨앗 관리며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동물들을 돌봐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갈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식구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직장 후배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거북이 한 쌍을 임시 입양하여 관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오지랖 넓은 생활인가요.....)
 
지금도 동료나 선배, 후배들은 서울 입성을 권합니다.
하지만 난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내가 좀 더 고달퍼도 그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다면

난 언제나 그 선택을 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표현이 답답하고 어눌하고, 아내 맘, 잘 몰라주고 가끔 뜬금없는 반응을 해도
마음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내도 알겠지요.

그래도 살다보면 마음 상하고 속상한 일이 생기는 거겠지요.

그건 또 서로 잘 풀어가며 살아야지요.


여보. 순화씨! 부탁합니다.

아무리 궁금하고 조급해도 내가 좀 더 잘 표현하고 알아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을까?
살다보면 답답하고 이게 아닌데 싶다가도 그 순간을 넘기는 순간,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질 줄 누가 알어?

그러니까 느긋하게 기다려줘. 순화씨. .


그리고 순화씨! 글을 쓰며 나를 소재로 하는 건 좋은데 좀 살살해주라.

각색도 좀 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어도 좋은 사람. 바로 당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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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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