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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을 떼고 나면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는 것.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 여름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으나 모유수유를 하는 관계로 맥주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결혼을 하기 전엔 폭탄주 열 잔도 기분이 좋으면 꿀꺽꿀꺽 마시던 나였다. 그러나 결혼과 임신, 출산을 반복한 최근 5년 동안 나의 주량은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술 마실 기회도 많이 줄어들었다. 일 때문에 취재원과 마셔야 하는 자리 빼고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어쩌다 지인들과 술을 마시더라도 집에 있는 아이 생각에 맘 편하게 먹을 수 없었다. 


열흘 전 젖을 떼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민지 어린이집 단짝 친구인 도훈 엄마와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도훈 엄마가 그 날 남편이 출장을 가 다른 엄마와 저녁에 도훈이네집에서 술 한 잔 하기로 했다며 나를 초대했다. 아이들 키우랴, 알뜰살뜰 살림 하랴 여러 가지로 고단한 엄마들이 오랜만에 모여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엄마들은 술 한 잔 한다 하기에 나도 합류하기로 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술인가. 술을 안 마신지 2년이 넘었다. 엄마들과 친분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총 4명의 엄마가 모였고, 아이들도 같은 어린이집 다니는 또래였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면서 도훈엄마가 해준 주먹밥과 머핀을 맛있게 먹으면서 잘 놀았다. 민지도 친구집에 놀러와 기분이 좋은지 엄마를 괴롭히지 않고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다. 오후 6시에 모여 맥주파 엄마는 맥주를 마시고, 소주파 엄마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는 각자 준비해 온 과일과 과자, 라면 등으로 해결했고, 4명의 여자는 남편 얘기부터 어린이집 얘기, 아이들과 시댁 얘기 등등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젖 떼고 처음으로 먹는 맥주의 그 맛. 캬~ , 정말 꿀맛이었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갈증이 확 사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안 먹던 술이라 그런지 맥주 3잔을 마셨더니 얼굴이 조금 빨개졌고 약간의 흥분 상태가 됐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분위기는 무르익어가면서 엄마들 사이에 존재했던 약간의 어색함들이 사라져갔다. 어색함이 사라지면서 엄마들의 속 깊은 얘기도 슬슬 하나씩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아 헤헤 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남편이었다. 시각은 저녁 9시. 정말 눈 깜짝할 새 저녁 9시가 돼 버렸다. 아이들 재우는 시간이었다.

  

 “어디야?”

 “응. 도훈이네집. 당신은 어디야?”

 “나 금방 집에 들어왔어. 애기들 안 재워?”

 “응. 재워야지. 이제 곧 가려고. 지금 맥주 한잔 하고 있는데 곧 갈거야” 

 “내참. 정신나간 거 아냐? 애들 재울 시간에 술 마신다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얼른 들어와! 민규는 울고불고 난리다. 어서 와서 애들 재워!”

  

남편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고, ‘정신나간 거 아냐’라는 말이 내 귀에 거슬리면서 기분이 확 상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술에 기분이 좋아 노래방에 가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던 아주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남편이 폭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전화기에 대고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싶었지만 다른 엄마들 앞에서 남편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알았어... 금방 갈게...”라고 대답하고 민지를 데리고 도훈이네집에서 나왔다. 민지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했고, 다른 엄마들은 내가 남편 전화 받고 일어서자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듯 했다. 

  

도훈이네 집에서 우리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민지를 데리고 집에 걸어가는데 너무 우울하고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내가 날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2년 만에 그것도 민지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과 술을 마신 것이었다. ‘정신 나간 마누라’ 취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제 시간에 재우는 게 좋고 당연한 것이지만, 하루 정도 엄마의 사정 때문에 아이가 늦게 잘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치자면 남편은 회사 일로, 개인적인 일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적도 있고, 밀린 드라마 챙겨보고 야구 생중계 보느라 밤늦게 자는 적도 많다. 사실 아이들 재우는 것은 아이들 낳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주로 해왔다. 젖 주느라고, 아이들 잠버릇 때문에 잠 한번 편하게 못 잔 세월에 4년이 넘었다. 남편은 둘째 낳고난 뒤부터는 아예 작은 방에서 따로 편하게 자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남편이 나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고 나를 애 키워주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젖떼고 처음으로 마신 맥주의 그 시원함과 기분 좋은 상태는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리고, 난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했다. 

  

집에 들어서자 남편의 첫마디는 나를 또 폭발시켰다.

 

 “제 정신이야? 이 시간에 남의 집에서 술 마시고?”

 “그래. 그게 어때서?”

 “뭐? 그게 어때서? 지금 당신이 잘했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잘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죽을 죄를 지은 것은 뭔데?” 

  

그렇게 우리는 부부싸움을 시작했다. 남편은 아이들 리듬을 깨는 것은 잘못 된 것이고 술 마신다고 아이를 늦게 재우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어쩌다 한번 엄마가 술 한 잔 할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아이가 늦게 잘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한참을 얘기하다 보니 남편은 슬슬 자신의 표현방식이나 태도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 재우는 것을 너무 나의 책임으로만 돌렸다고 인식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내가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더니, 나중엔 “그렇게 술 한잔 하고 싶었으면 미리 내게 얘기를 해라. 그러면 내가 미리 들어와 아이들 재우고 당신은 나한테 아이 맡겨놓고 다시 나가 더 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나는 남편이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옮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재차 확인했다. “당신 당신이 한 그 말에 책임져. 내가 뭐 자주 술 마시면서 남의 집에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인데, 혹시라도 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당신한테 미리 말할 테니 그날은 당신이 책임지고 아이들 재워야 해, 다음에 딴 소리 하지마! ”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우리 둘은 부부싸움을 크게 했고, 이번 부부싸움을 통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로의 가치관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절충책에 합의를 본 것이다.

  

젖떼고 나서 사실 남편과 오붓하게 앉아 맥주 한 잔 하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는 없었고, 오히려 부부싸움만 했다. 젖떼고 처음 마신 맥주의 그 짜릿한 맛과 기분을 앗아가 버린 남편에게 조만간 맥주 한 잔 사라고 얘기해야겠다. 다시 한번 느낀 것이지만 남편은 애다. 내가 자식을 몇이나 키우고 있는 것인지...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여, 제발 철 좀 드시라. 아내도 사람이고 인격이 있고 놀고 싶고 배려 받고 싶다는 걸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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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아 기자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 강철같은 몸과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길을 춤추듯 즐겁게 걷고 싶다. 2001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사회부·경제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라이프 부문 삶과행복팀에서 육아 관련 기사를 썼으며 현재는 한겨레 사회정책팀에서 교육부 출입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더 행복해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저서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존감은 나의 힘>과 공저 <나는 일하는 엄마다>가 있다.
이메일 : anmadang@hani.co.kr       트위터 : anmadang21      
블로그 : http://plug.hani.co.kr/an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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