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제왕절개 끝에 만난 아이.
아이에겐 태어난 바로 그 날 부로 새로운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클리펠 트리나니 증후군,' 줄여서 케이티(KT).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다행히도 이 증후군의 존재와 특징을 잘 알고 있는 의사를 한번에 만난 덕에 출산 후 몇 시간 만에 바로 진단명을 찾을 수 있었던, 아주 운 좋은 경우였다. 이 증후군은 인구 10만명 당 한 명 꼴로 나타나는데, 미국 내에서도 이 병에 대해 알고 있는 의사는 많지 않다. 그래서 길게는 수 십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병명도 알지 못한 채 고통받는 환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에게 그 진단명을 정확히 내려준 신생아담당 의사는 곧바로 아이를 큰 도시의 아동병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곳에서 MRI를 찍고, 관련 의사 여럿을 만나 추후 조치를 받게 될 거라 했다. 그래서 옮겨간 곳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차로 1시간 10분 가량 떨어진 인디애나의 주도, 인디애나폴리스에 소재한 대형 아동병원이었다. 주로 미숙아들이 머무는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에 아이를 들여보내놓고, 우리는 같은 층에 마련된 가족용 휴게실에 들어갔다. 휴게실에는 아이를 NICU에 넣어놓고 보호자들이 잠시 눈을 붙이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여러 개의 유축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술 부위가 따갑고 아파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마냥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술 후 내 몸을 회복하는 데도 신경써야 했기에 식사를 잘 해야 했고, 모유 수유를 위해 때마다 유축실에 들어가 유축기를 돌려야 했다. 겨우 겨우 짜낸 모유를 자그마한 병에 담아 NICU에 들어가 있는 아이의 담당 간호사에게 전달하는 건 남편 몫이었다. 한번씩 아이를 방문해 잘 자는지, 잘 먹는지도 보고 직수 연습도 해 보고 기저귀 갈기도 해봐야 했다. 아이 보험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가지 서류를 작성해서 병원 내 보험 담당자와 면담도 수 차례 했고, 퇴원을 대비한 교통편 준비, 마음의 준비를 도와주는 병원 내 복지사(소셜워커)와도 만났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엔 교통편 확보를 위해 여러 지인들에게 전화를 넣어야 했다.
월요일 아침에 전원되어 NICU에 들어간 아이는 별 다른 조치 없이 이틀 밤을 보냈다. 출생한 병원에서도 그랬지만, 아동병원에서도 다리 문제 외에 건강 상의 다른 문제는 전혀 없어 보인다고 했다.우리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월요일 저녁부터는 우리도 조금은 마음을 놓은 상태로 쉴 수 있었다. 제왕절개를 '메이저급 수술'로 인식해 배려해 준 덕분에 월요일 밤에는 NICU와 같은 층에 있는 조그만 방을 배정받아 휴게실 바닥이 아닌 길다란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화요일에는 입원/수술 환자 보호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인 '로널드 맥도널드 하우스'에서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 때서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무르익어 가는 연말 분위기를 여기 저기서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미리 끓여 거기까지 가져 온 미역국에 햇반 하나 넣어 말아 먹을 때마다, 또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얻은 초콜렛 칩 쿠키 하나를 입안 가득 베어 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건, 앞으로 세상을 살며 사람과 세상에 더 많은 애정을 주고,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살라는 뜻 아닐까.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인 나에게 이런 특별한 아이가 온 것은,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을 간섭이나 부담으로만 여기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도 알라는 뜻 아닐까. 그래서 나아가 나 역시 그렇게 나와 타인들에게 더 따뜻해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아이는 수요일 아침에 MRI를 찍었다. 결과는 몇 주 뒤 담당 의사를 만나 듣게 될 거라고 했다. 그 날 늦은 오후, 우리 세 식구는 친구의 차를 타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온전히 우리끼리 맞는 새 날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미국 뉴스는 온통 샌디 훅 총기사건 소식으로 얼룩져 있었고 한국 뉴스는 신임 대통령 얘기로 떠들썩했지만, 우리 세 식구 살 맞대며 사는 그 작은 공간에서는 매일 매일 기적같은,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가 살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을.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구태의 악습. 편견. 미비한 제도적 뒷받침. 돈, 외모, 능력, 결과 지상주의가 빚어내는 야만성. 사회경제적 약자일수록 더욱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 그 속에서 한쪽 다리와 발이 크고 긴, 그래서 남들과 보폭 맞춰 걷기 힘들고 절룩거리며 살게 될 내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멀쩡한 아이들도 숱하게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곳, 아이들이 365일 교실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그 곳, 수학여행 하나 맘 편히 못가는 그 곳이, 다리 불편한 내 아이에겐 얼마나 더 아프고 힘든 곳이 될 지, 우리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