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남편이 편지 한 통을
건네왔다. 연애시절에도, 결혼 이후로도
종종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은 우리지만 최근 3년 동안엔 생일 카드 한 장 짧게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폭풍육아, KT 때문에 생기는
잦은 병원 행, 학업과 살림에 치여 그저 매일 서로 다독이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방학을 한 지금도 매일 학교에 나가 다음 학기 강의 준비와 논문 준비를 하느라 바쁜 남편이
뜻밖의 편지를 내민다. 남편의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느꼈다. 아, 연말이구나. 나 올 한해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하고.
작년 이맘때 나는 한국에 있는 KT 증후군
환자/보호자들을 위한 모임을 꾸려보고 싶어 온라인 카페를 하나 개설했다. 현재 가입자 수만 88명. 물론 모든 가입회원이 활발하게 카페 활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KT 환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설한 카페이니만큼 1년만에 이만큼의 KT 환자/보호자를 모았다는 것은 굉장한 성과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고 필요한 정보만을 구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는 때도 많았다. KT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접근법이나 치료법에 정답은 없지만 그 동안 우리 각자가 겪은 고충들을 터놓고 나누면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도움이
될 거라고, 제발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아달라고 때로는 사정하고, 때로는 으르렁(?)거렸다. 다른 ‘환우회’와는 다르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와 결부되는
이러저러한 사회 문제들을 공론화할 수 있는 공간을 꾸리겠다고 다짐했기에 운영자로서 생각하고 관리해야 할 것도 많았다. 한국어로 된 전문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내가 얻는 각종 영문자료를 번역해서 올리는 것도
일이었고, 또 이곳 KT 환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KT 환자들의 블로그 글을 번역해서 연재하기도
했다. 개설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게시글도 제법 쌓이고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분위기도 어느 정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지만, 한 해
한 해 조금씩 더 열심히 꾸려서 내가 꿈꾸던 공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올 한 해를 정리하는 데 또 빠질 수 없는 것은 물론 <베이비트리>다. 최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바빠져 겨우 2주에 한 번쯤 쓰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내가 오래도록 생각해왔던 ‘본격 글쓰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 ‘본격’ 글쓰기가 몇 년 후 ‘전격’ 글쓰기로 진화하게 될는지 어떨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꾸준히 공개적으로 글을 쓰게 되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왜 쓰고 싶어하는지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가끔 내가 쓰는 글이 ‘생생육아’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같아 다른 공간을 찾아봐야 하나 생각해본 적도 있다.
‘생생육아’하면 말 그대로 생생한 육아의 현장, 뭔가
유쾌 발랄하면서도 지지고 볶는 육아와 일상의 고군분투기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그런 느낌
때문에 일부러 한 번씩은 그야말로 ‘분투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서투르게나마 진지하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정말로 꺼내놓고 싶은 얘기들은 대개 나 한 사람의 육아분투기를 넘어서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쓰기에 좀 더 적절한(?) 혹은 분위기가 맞는 곳을 찾는 건 별로 의미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변 분위기와 맞지 않는 듯한 기분에 조금 낯설어도, 주변 사람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많이 달라 가끔 기운이 빠져도 다른데 보다는 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애정을 붙이고 있는 <베이비트리> 덕분에 올 한해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카페도, <베이비트리>에 글 쓰는 일도 모두 내가 ‘케이티의 엄마’여서 시작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이 일들은 나를 엄마로서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 생생히 살아있게 한다. 비록 돈을 버는 일은 아니어도, 내가 애정과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하는 일이 있고 또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며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으니
자존감을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부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내가 쓴 글을 가장 먼저 읽고
반응해주는 남편과, 신나게 노느라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내게 안겨 그 작은 입술로 사랑한다
말해주는 아들 덕분에 올 한 해 열심히 살았다. 안타깝기만 한 불치의 병을 타고났지만 아이가
비교적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도 내가 아이에게만, 아이의 병에만 몰두하지 않고 다른 생산적인
일들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아이는 만 세 살 생일을
무사히 맞이했다. 막 태어났을 때 크고 두꺼운 다리와 발 때문에 혹여 못 걷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했던 아이가, 이젠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뛰어가 있다. 한쪽 다리가 무겁고 길어 점프는 결코 못할 줄 알았던 아이가 이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두 발을
동시에 떼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아이의 점프를 본 것만으로도 우리의 1년은 충분히 행복했고, 기뻤다. 새로운 한 해,나도 아이도 지금처럼 건강히, 잘 자랐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나는 케이티와 춤추며 함께
뛰고 함께 점프하고 싶다. 나도 아이를 따라 그렇게 조금씩 더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