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뽀뇨 학부모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아내와 미리 약속시간을 정했다. 아내가 다른 것은 건너뛰더라도 학부모 상담만은 칼같이 지켰기에 나는 올해도 시간이 늦을까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10년을 함께 살아오며 아내가 내게 화를 냈던 유일한 때가 바로 상담시간을 까먹었거나 늦었을 때니까.
그런데 아뿔싸.. 하필 그 시간에 컨설팅 방문 일정이 잡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2학년 올라가며 새롭게 만난 선생님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긴장의 대상이었나보다. 나는 일부러 아이를 교실까지 데려다 주며 선생님께 인사를 여러 번 드렸고 뽀뇨를 성가시게 하던 짝지 자승이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자승이가 느낄진 모르지만. 아내가 혼자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울 듯 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가려고 했지만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상담시간인 오후 2시를 한 시간 지나 아내에게 톡이 왔다. “상담 끝. 3월에 본 진단평가에서 뽀뇨가 수학 꼴등 했데요” 쩜쩜쩜. 선생님은 뽀뇨가 뭐든지 가장 늦다고 했단다. 메모장도 제일 늦게 쓰고 문제도 가장 늦게 풀고. ‘아이가 꼴등했다’는 선생님 앞에서 아내는 감정이 참 복잡했다. 내가 함께 갔더라면 어떨까.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나는 뽀뇨의 수학문제집을 들었다. 한참 덧셈의 개념을 익히고 있는 아이에게 이를 설명하자니 참 어려웠다. “뽀뇨야, 100개 묶음이 하나 있고 10개 묶음이 두 개있어. 더하면 몇 개일까?”, “어, 30개?” 쩜쩜쩜. 두 페이지를 넘어가는데 1시간이 걸렸다.
어른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인데. 수학이 살아가는데 아무짝에 필요 없지만 학생에게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에 답답한 마음을 참고 또 참다가 소리를 쳤다. “뽀뇨야, 수학 문제 풀 때는 집중을 해야지” 만만하게 여기는 엄마, 아빠가 선생님처럼 하려니 뽀뇨 입장에서는 집중이 안 되었을 것이다. 아빠 입장에서는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는 것이나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얌전하게 책 읽고 공부를 잘했던 아내에게는 초등 2학년생 딸의 성적이 놀라웠나보다. ‘아빠는 본고사 수학을 잘 봐서 대학에 합격했고 엄마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내 딸은 공부머리가 없는 건가’하고. 사실 나는 아내에게, 아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지금은 글 잘 쓴다고 부러움 받는 나도 고3때 논술을 ‘3점’ 받은 적이 있다. ‘30점’아니고 ‘3점’. 친구들이 나를 놀렸다. 어떻게 하면 ‘3점’을 받을 수 있냐고.
실의에 찬 아내와 낙담하고 있을 아내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논술 3점을 받던 아빠가 책을 두 권내고 신문에 칼럼까지 연재하고 있다고. 계속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본고사 수학 만점을 받았던 아빠도 사실 수학이 무지무지 싫었다고. 그런데 하루 하루 풀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사실 다른 게 두려웠다. 우리가 아이 공부 가르쳐 주는 것을 남에게 맡기지나 않을까. 아이 사교육을 시키기 위해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밤늦게 까지 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제주에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가고 돈 많이 버는게 인생의 성공인가. 그게 아니어서 우린 30대 초반에 서울을 떠난게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아이와 함께 매일 저녁 수학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어떨 때는 다른 아이들처럼 4살 때부터 그냥 학습지 맡기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또한 부모생각일 따름이다.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언하고 지원해주는게 부모역할이기에 하나하나 아이의견을 물어서 가야지. 그게 함께 멀리 가는 거니까.
» 뽀뇨는 아빠를 닮아서 참 느리다. 느리더라도 우리 제대로 가자, 뽀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