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통에 있는 시골 교회 젊은 목사 이제환입니다'로 시작되는 메일을 받은 것은
10월 초였다.
군인 가족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도시보다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육아 고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 엄마들을
대상으로 교육 모임을 열고 계신 분이었다.
내가 쓴 책 '두려움 없이 엄마되기'를 읽으셨는데 나를 꼭 교육모임의 강사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잠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군포와 그 목사님이 계신 강원도 원통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강원도 강릉이 시댁이라 동해바다쪽은 자주 다녀오지만 원통은 강릉과는
전혀 다른 내륙이었다.
블로그를 오래 하고 책을 한 권 낸 것이 계기가 되어 이따금 강의 요청을 받곤 한다.
대개는 서울이나 경기도였다. 지방에서 강의를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리가 멀면 오고 가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강사비보다 더 많이 드는 교통비며
이런 저런 경비들이 서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었다.
귀한 초대지만 사정의 여의치 않아 가기 어렵겠다는 메일을 보내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럴수가 없었다.
지방 오지의 작은 군사도시라는 여건 때문에 육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엄마들에게 좋은 강의를 전해주고 싶어도 그 먼 곳까지 와주는
강사들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사정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내가 꼭 와주기를 바라는 젊은 목사님의 진심이 나를 울렸다.
지역에서 꼭 필요한 일을 교회의 역할로 여기고 최선을 다 하고 계신 목사님의
열정도 감동스러웠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가 그 지역의 엄마들에게
도움과 희망이 되리라고 믿어주는 그 마음을 저버릴 수 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 여행 삼아 다녀오겠다고 연락을 드렸다.
마침 그 근처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남편의 친구가 좋은 숙소를 구해 주었다.
설악산 백담사가 가까운 곳에 있어 가족과 함께 들러 올 수 있을 듯 했다.
이렇게 해서 예정에도 없던 1박 2일의 가족여행이 결정 되었다.
강의는 11월 8일 토요일이었다.
동창들과 여행을 가신 아빠 대신 친정을 홀로 지키고 계신 엄마도 모시고
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결혼 10주년 때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숙박을 해가며 가족들과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다섯 식구가
숙박까지 하며 여행을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댁이 있는 강릉을 이따금 오가는 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여행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설레었을까. 게다가 결혼하고 엄마와 함께 잠을 자며
여행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들도 나도 즐겁고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강원도 원통에 있는 '월학교회'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교회는 내가 상상했던 시골 교회, 딱 그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교회 근처에 있는 염소 우리에 열광했다.
'이제환'목사님은 내 예상보다 더 젊은 분이었다. 30년 된 이 월학교회가
신학교를 마치고 처음 담임목사로 부임한 곳이라고 했다.
한 살이 갓 넘은 어린 아기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아무 연고도 없던
이 작은 교회에 온지 10개월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곳에 와보니 지역의 특성이
보였고 지역에 꼭 필요한 일을 찾게 되어 '행복한 부모교실'을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와 열정과 헌신을 다 하는 진실되고 순수한 목회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감동스러웠다.
예배당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교육실은 이쁘게 꾸며져 있었다.
교회는 작았지만 이 공간을 정성껏 가꾸어가는 신자들의 정성과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들까지 합해서 주일에 한 스무 명 모여 예배를 드리고 다 같이 점심밥상을
나누는 따스한 공동체였다.
강의라기 보다는 즐거운 수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 키우면서 힘든 것들을
듣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 같이 생각을 나누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풍부한 자연환경과 아이를 같이 돌보는 따스한
공동체인데 이곳은 이미 이 두 가지가 다 있는 곳이니 제일 좋은 것을 내 아이에게
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복한 육아를 하자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서로 위안을 얻고 희망을 얻었던 행복한 자리였다.
강의를 마친후에는 목사님의 유쾌한 진행으로 행운권 추첨을 했다.
참석한 사람 절반 이상이 작은 선물을 받으며 즐거워 했다.
친정 엄마도 작은 과자 선물을 받으셨는데 행운권에 뽑혀본 것이 평생 처음이라며
아이처럼 깔깔 웃으셨다.
명랑하고 유머 넘치고 열정 가득한 이제환 목사님과 든든하고 따스한 내조를
하는 사모님 내외분을 알게 된 것은 올 해 얻은 귀한 선물이다.
강의 끝 무렵부터 내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 빙글거리며 내 이야기를 같이 들어준
세 아이들에게도 분명 특별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원통의 숙소에서 편안한 밤을 보낸 우리는 이튿날 설악산 백담사에 들렀다.
젊은 시절 등산을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과 대청봉을 오르고 봉정암에서 하루 묵은 뒤
백담사까지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곳은 놀랄 만큼 변해 있어
아쉬움도 있었지만 딸 덕에 몇 십년만에 이곳을 다시 와 본다는 친정 엄마는 감격스러워
하셨다. 아이들은 백담사 계곡에서 높은 돌탑을 쌓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백담사에서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7킬로의 거리를 나는 딸들과 친정엄마를 모시고
버스로 내려왔지만 남편과 필규는 한시간 반에 걸쳐 걸어 내려왔다.
'백담'이란 백 개의 연못이라는데 백담사 계곡, 구비구비 휘어지고 펼쳐지는 백 개의 연못을
보며 남편과 필규가 걸어 내려왔을 그 길을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돌아오는 길은 지독하게 막혔고 답답한 차 안에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다섯 살 막내부터 열두 살 큰아이까지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고, 의젓하게 견뎌내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잘 자라주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어 더 감사했다.
인천 부평에 있는 친정에 엄마를 내려 드리고 군포에 있는 우리집까지 오니 시간은
밤 열시가 넘어 있었지만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도 오래 오래 가족 여행이 즐거웠다는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이틀 동안 먼거리를 운전해준 남편도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왔는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로서 늘 새롭게 배우고 나날이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서로 힘이 되어 주자고 새삼 다짐하게 된다.
우리 가족에게 특별하고 귀한 추억을 선물해주신 강원도 원통의 '월학교회' 식구들과
'이제환'목사님에게도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