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주와 함께 내 세가지 소원 중 하나는 시집내기였다.
소원이 어느 정도였냐면 시를 쓰고 잠들기 전 침대에서
매일 밤 가족을 초대한 시집 출판기념회를 생생히 그려보았다.
내가 시를 읽고 어머니와 누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이 생생한 꿈을 꾼지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꿈이 시인인 청년이라.
친구들은 ‘시인’나셨다며 비꼬기도 하고 어떻게 살까하고 걱정도 많이 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는 딱 시쓰기가 멈추었으니
내 시는 외로워서 쓴 일기에 다름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찌되었건 나의 첫 번째 소원을 이루고
지난해엔 생각지도 않게 시집이 아니라 육아책을 주제로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아주 가끔 함께 시를 공부하던 분들의 신춘문예 등단 소식이며
책 출간 소식을 접할 때면 나도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전화를 건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요즘 시는 어떻게 잘 쓰고 계셔요?”,
“매번 그렇게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홍선생은 제주에 내려가셔서 잘 계시나요? 시도 쓰고 계시구요?”,
“결혼하고는 시를 잘 안쓰게 되네요. 제주에 내려와서 결혼식 축시 한편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쓰질 못했어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잘 하실거에요. 시 수업할 때 고형렬선생님 애제자였잖아요”,
“에이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 요즘 쓰고 계신 시 있으시면 좀 보내주셔요. 잘 계시구요”
이렇게 전화를 끊고는 시도 부쳐오질 않았고 나도 시를 쓰고 있지 않다.
또 언젠가 시를 쓰겠지 하며, 시와 연을 맺겠지 하며 시간을 보내다 아버지의 시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고 많은 시들 중에 왜 아버지의 시를 떠올리게 될까?
2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30대 중반에 결혼하여 아이 둘 아빠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아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나와 내 아버지가 겹쳐지는데
대부분 아빠들처럼 나또한 내 아버지를 통해 아빠를 배우고 또 느끼고 있다.
배운다는 표현보다는 끊임없이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아빠됨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겠지만 우리네 아버지는 외롭다.
세상에 혼자 있는듯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과묵함을 지나쳐 화가 난게 아닌가라고 오해할 정도로 불소통의 존재이다.
세상과 맞서다보니 지쳐서 되돌아오는 것이 가정이니 아이들이 반갑고
또 나가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극히 가부장의 논리인데 이 아버지의 시가 우리 아버지와 부모세대를 말해준다.
박목월의 ‘가정’이라는 시는 밤늦게 귀가하는 시인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현관에 가득한 것이 아이들 신발인데 그중에서도 막내의 신발이 눈에 걸린다.
‘연민의 삶의 길’을 걷는 ‘십구문 반’의 어설픈 존재,
시인이지만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미소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해가 제법 떴을 때 출근하여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지만
현관앞에 서면 바로 이 시를 떠올리게 된다.
아내와 둘째가 “빠이 빠이”를 하러 현관까지 나오고 돌도 되지 않은 둘째는 “빠이 빠이”를 배워
손을 제법 잘 흔든다. 육아하는 아빠를 제외하고 아르바이트라도 집을 나서는 아빠가 있다면
아마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잠시간의 헤어짐.
그리고 간절한 그리움.
저녁이 되면 미소하는 대한민국 아빠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빠의 마음은 변함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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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