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작비 좀 깎아주세요”
처음에 지인에게 엄마 책을 부탁할때만 해도 그 정도 쯤이야 하며 호기를 부렸는데 선금 100만원을 내고 잔금을 치르려고 하니 겁이 났다. ‘올해 돈을 한 푼도 못 모았다’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누나들과 나누어 내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까 싶어 끝까지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린 책이건만 제작사에는 천천히 만들어도 된다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책이 새해에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엄마의 삶을 담은 책을 ‘옛날 힘든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가 있겠냐’며 거부의사를 분명히 한 누나들.. 하지만 누나들은 모두 기꺼이 책 서문을 써주었다.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엄마는 항상 짜증과 화를 나에게 풀곤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웠다’는 도입부로 시작했지만 ‘엄마도 어여쁜 아가씨였구나.. 더 잘해야지’로 끝나는 훈훈한 마무리.
설을 며칠 앞두고 엄마책의 완성본 대금 정산을 어떻게 해야할까 머리가 아파왔다. 1/n로 할 것인지 여유 있는 이가 더 내는 방향으로 해야할 것인지. 무엇보다도 책 제작비를 깎아달라는 요청에 어떻게 답장이 올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서귀포 책읽기 모임원들에게 엄마 책 자랑을 하고, 출판사를 운영한 그룹원에게 너무 저렴하게 제작했다는 칭찬(?)까지 받은 입장에서 더 깎아달라는건 염치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며칠 뒤 지인이 어렵긴 하지만 조금 더 조정해주겠다는 메일을 보내왔고 나는 그 메일을 읽은 즉시 누나들에게 단톡을 날렸다.
“누나 드디어 책이 나왔다. 내가 선금으로 작년에 100만원을 냈는데 나머지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네 ㅠㅠ ”
걱정을 했는데 프랑스자수 선생님으로 사회활동이 활발한 대구의 막내누나가 바로 답장을 줬다.
“그럼 우리가 나누어서 내자. 언니야. 예전에 엄마 칠순 때 드린다고 모아둔 돈 있는데.. 그거 쓰고 모자라는건 셋이 모아서 내지 뭐”
나머지 두 누나는 다시 조용. 한참이 지나
“헐. 그러면 나머지 있는 돈으로 줄까. 엄마한테는 돈을 못 주겠네. 책이 선물이네.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는 큰 누나. 둘째누나는 이날 이야기가 없었다.
드디어 설 명절. 천키로를 달려 창원집에 도착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누나들이 오는 설명절 당일 날 책을 전해줘야지, 과연 어떤 식으로 책을 드리면 좋을까 고민을 하게 되는데... 갑자기 엄마가 내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야, 농협에서 뭐가 날아왔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보증을 서서..”
들어보니 돌아가신지 10년이 다되어가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지인 분께 보증을 섰는데 지인분이 아직 갚지 않아서 연대보증을 선 아버지(혹은 상속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통지가 온 것이다. 엄마 칠순 생일을 며칠 앞둔 새해벽두에 이게 무슨 일이람. 시골집 침대에서 잠들 때까지 연대보증의 책임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하다 잠이 들었다.
설 명절 차례를 지내려고 일어나보니 엄마는 잠을 못자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차례 지내려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데 하필 향이 다 떨어져 버렸다. 워낙에 시골동네인지라 인근 마을 슈퍼는 명절이라 문을 닫았을테고 그나마 편의점에 있지 않을까 인근 지역에 전화를 모두 돌렸는데 딱 그것만 없었다.
옆집에 빌려오자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고 그렇다고 그걸 사러 멀리 도시까지 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지 않을까 싶었는데.. 엄마가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내었다. “어차피 그 향도 향이니까. 커피를 차례상에 올리면 안 되겠나” 이렇게 난데없는 커피가 차례상에 올라갔는데도 또다시 촤악 가라앉은 분위기. 엄마는 고얀 남편이 미웠는지 차례 순서도 헷갈리고 둘째 유현이는 절을 안 하겠다고 우는 통에 차례를 어찌 지냈는지도 모르게 끝났다.
<아마도 전국에서 차례상에 커피가 올라간 집은 우리집밖에 없을듯>
드디어 우리 식구들이 모두 모인 설 명절 당일 저녁. 식구가 모두 모이기가 쉽지가 않아서 엄마 칠순생일상을 이틀 앞당겨 준비하게 되었다. 미리 케익도 준비하고 해물찜과 갈비찜, 과메기 등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장만했다. 뽀뇨는 절대 케익 준비하는걸 할머니에게 얘기하면 안된다는 둘째 고모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부엌을 오가며 “할머니.. 깜짝 놀라게 해줄게 있는데”를 수 십번을 반복하며 분위기를 띄웠고 나는 엄마에게 책을 드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직감했다.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큰 웃음 웃어준 누나들에게 감솨>
“생일 축하합니다~”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는 타이밍에 엄마에게 책을 드렸다. 책의 가격을 설 이틀 전날 둘째누나에게서 들은 데다(엄마는 누나에게 전해듣기 전에는 내 친구가 공짜로 만들어준 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통지서까지 받게 되다보니 엄마의 기쁨은 덜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만족했다. 누나들과 조카들이 함께 모여서 가족사진들을 넘겨보며 다 같이 한마디씩 하고 웃었고 대구 큰조카인 사빈이는 외할머니 책을 꽤 오래 읽었다.
전주 처가로 향하는 날 아침, 가족들에게 새해에 희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는데 엄마가 며칠 동안 속으로 앓은 근심을 꺼내었다. 가족들이 함께 걱정하며 잘 해결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엄마 얼굴의 수심이 조금은 옅어지는 듯 했다.
<어느덧 대가족이 된 우리 가족>
집을 떠나오는 차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어제 귀가 간지럽지 않았어요? 누나들이랑 나랑 부엌에서 자기 욕을 엄청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자형이랑 술마시면서 혼자만 어찌나 크게 웃던지.. 당신은 어떻게 어머니 마음을 그렇게 몰라요. 안 그래도 난데없는 통지서 때문에 한 푼이 소중한 시기에.. 모아놓은 돈을 드리는게 낫지.”, “그러게요.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져서..”, “근데 어머니 있잖아요. 큰조카 사빈이가 어머니 책을 읽고 나니까 옆에 다가가서 ‘사빈아, 책 잘 읽었나. 할머니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았다’라고 하시더라구요.”
거의 한해가 걸린 엄마책 프로젝트! 지난해에 끝내고 드렸어야 하는데 칠순인 엄마의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되어버렸다. 통지서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돈은 또 벌면 되는 것. 엄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