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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아나바다 복합 상설 매장 '울'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 근처에 공간을 임대해  쓰지 않는 물건들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곳이다.
이곳이 생긴 다음부터는 나도 집안에서 쓰임이 다한 물건이다나 입지 않는 옷가지들등을

자주 기증하고  있다. 물론 '울'에서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일도 적지 않다.
아들은 학교에서 환경 관련 세미나를 하면서 '울' 매장을 준비하고 단장하는 작업에 참여했었다.
가끔 '울'에 갔다가 물건을 고르고 있는 학교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잘 고르면 괜찮은 옷들을 몇천원 정도에 살 수 있어서 아이들도 용돈을 들고

물건을 사러 오곤 하는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갑작스레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등과정 진학과 동시에 그렇게 원하는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아들이지만 공동생활 중에는

스마트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서 집에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깜짝놀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와, 아들, 엄마 보고 싶어서 전화한거지?" 호들갑 떠는 나에게 아들은 다짜고짜
"엄마, 윤정이 신발 사이즈가 뭐예요?" 묻는 것이다.
"윤정이? 글쎄... 220인가, 225인가? 근데 왜?"
"저 지금 '울'에 있는데요, 진짜 이쁜 운동화가 있어요. 윤정이 맞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게 사이즈가 230이예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무조건 사와야지. 오빠가 여동생에게 운동화를 선물한다는데 조금 크면 어때.
뒀다 신으면 되지. 그런데 얼마짜리야?"
"5천원이요. 완전 새거같아요. 제 용돈으로 사면 되요"
"그렇게 큰 돈 써도 괜찮아? 너, 니 돈 엄청 아끼잖아"
"상관없어요. 요즘 돈을 아주 물 쓰듯 쓰고 있다고요. 큭큭"
아들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소식을 윤정이에게 전했더니 오빠 최고라며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나도 딸들과 같이 뛰며 좋아했다.
세상에나 우리 필규가 제 용돈으로 여동생 운동화를 다 사다니, 이게 왠일인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에 기특하고 대견해서 덩실 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었다.

필규는 제 돈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한 녀석이다.
급하게 현금이 필요해 몇 천원이라도 녀석에게 빌리면 다 갚을때까지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자도 철저하게 챙겨간다. 명절에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저금도 하지만

어지간히 큰 다음부터는 지갑에 몇 만원씩 꼭 넣고 다닌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뿌듯하다는 것이다.
가끔 편의점 같은 곳에 들러 군것질도 하는 눈치지만 쉽게 쓰지는 않는다. 학교 사람들을 좋아하는
녀석은 동생들한테는 절대 안 하면서 학교 후배 여학생들에게 과자를 사 주기도 하더라는 말을
이웃에게 전해듣기도 했었다.
흥, 제 동생들에겐 인색하면서 다른 여자들에겐 관대하구만... 눈을 흘기기도 했지만 그렇게
제 돈을 아끼는 녀석이 학교 사람들에겐 넉넉 할때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지만 제 용돈으로 가족에게 선물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동생들 생일에도 편지 한장이
고작인 녀석이 세상에나 5천원짜리 운동화를 여동생을 위해 사다니, 이건 정말 놀랄만한
일 이었다.


오빠의 선물2.jpg


토요일, 필규가 도착하자마자 윤정이가 달려나갔다.
필규는 여행가방을 열어 종이가방에 챙겨온 운동화를 꺼냈다.
하얗고 이쁜 운동화였다.
"꺄아, 오빠야, 이거 정말 이쁘다. 새거같다. 완전 맘에 들어"
윤정이는 운동화를 안고 펄쩍 펄쩍 뛰었다.
"이게 흰 색이라 너처럼 분홍옷 잘 어울리는 사람에겐 잘 맞을거다"
"윤정이가 핑크색 잘 어울리는거 어떻게 알아?"
"전에 보니까 핑크색 옷이 잘 어울리더라고요"
"맞아, 윤정이는 살결이 하얘서 밝은 색 옷 잘 어울려. 핑크도 잘 어울리고..
이거 신고 청바지 입고 핑크색 티셔츠 입으면 완전 이쁘겠네"
윤정이는 당장 신어 보고 좋아하는데 이룸이가 옆에서 입이 비죽 나왔다.
"질투 나, 질투 나. 언니 운동화만 사오고..."
"이룸아, 이번엔 너한테 맞는 신발이 없어서 못 나온거야. 다음에 그런 신발 나오면
오빠가 꼭 사올걸?"
"이룸아, 기다려봐" 필규는 이룸이를 달랬다. 이룸이는 금방 마음을 풀었다.
오빠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곱살 어린 이룸이에게는 잘 하지만 세살 차이나는 윤정이와는 자주 티격태격 싸워대던 녀석이다.
아홉살 막내는 아직도 오빠에게 이쁜 짓도 하고 오빠를 아주 아주 좋아해서 필규도 잘 하는 편이지만
열두살 윤정이에게는 절대 살가운 오빠가 아니다. 기분 좋을때는 같이 웃고 장난도 치지만
한번 시비가 붙으면 봐주지 않고 소리 질러가며 싸운다.

그럴땐 딱 사춘기에 들어선 열여섯과 열두살 남매다.
가끔은 이룸이만 이뻐하고 저는 미워한다며 윤정이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오빠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오빠를 챙기고 좋아하는 윤정이다. 어렸을때부터 윤정이는 늘 그런
여동생이었다. 그런 마음을 필규는 잘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윤정이에게만 틱틱 거린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 나이가 서로 살가운 때는 지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막내에게 하는 만큼
윤정이에게도 해주지..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서운하기도 했을 윤정이 마음이 오빠가 선물한 운동화 한 켤레로 눈 녹듯 사라졌다.
요즘 부쩍 옷이며 머리 스타일에 신경을 쓰면서 멋 내기 시작한 윤정이에게 새하얀 운동화는
맘에 쏙 드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쉽게 때 탈텐데 관리는 어떻게 할 거냐고, 아마 나라면
안 사주었을 것이다. 오빠니까 선물할 수 있었다.


오빠의 선물4.jpg


그날 저녁, 가족 모임을 위해 모두 둘러 앉았다.
지난 한주간 가족에게서 감동을 받았거나 고마운 느낌이 들었던 일들을 나누는 시간에
윤정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나는 윤정이가 누구 말 할지 알아요. 제가 고맙다고 하겠죠. 운동화 선물해줬으니까.."
필규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래? 오빠 얘기 하고 싶었어?" 내가 묻자
"네..." 윤정이는 이렇게 대답하고 바로 눈물이 글썽했다.
"오빠가... 정말 고마와요. 이렇게 이쁜 운동화도 선물해주고...."
특히 가족에게 특별한 친절과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때마다 윤정이는 언제나 바로 목이 메인다.
"이 운동화를 얻기 위해서요, 누나들 세명을 물리쳤다고요, 제가요.
'울'에 갔는데요, 이 운동화가 있는 거예요. 완전 이쁘잖아요. 누나들 세명도 서로 사겠다고
난리여서 저까지 네명이 가위바위보 했어요. "
"근데 오빠가 이겼어?"
"나만 주먹을 냈거든. 허허"
"이야, 정말 극적으로 손에 넣었구나. 완전 대단해. 하하"
우린 모두 웃었다.

"윤정아, 이 운동화가 오빠가 너한테 처음으로 준 선물일걸 ? 돈 주고 산 걸로는.."
"그렇다. 정말... 엄마도 완전 감동했어. 오빠는 자기 돈, 정말 아끼잖아. 엄마한테

잘 빌려주지도 않고... 그런데 동생을 위해서 5천원이나 써 가면서, 가위바위보까지 하면서

이 운동화를 사 왔다니.. 엄마는 정말 정말 감동했어. 너무 고맙고..."
필규는 쑥쓰럽지만 좋은 듯 훗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가 고단했지만 웃음이 넘치는 가족모임이었다.

월요일에 필규는 다시 묵직한 여행가방을 끌고 여동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윤정이는 새 운동화를 신발장에 고이 넣어 두었다.
가을이면 신을 수 있을거라며, 발은 금방 금방 클 거라고 기다리고 있다.

필규를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는 동안에도 나는 '엄마가 운동화 산 돈 5천원,
채워줄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은 바로 그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나중에 엄마한테 받을 생각을 하고 사왔을거라고, 분명 채워달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필규는 끝까지 그런 말 없이 씩씩하게 가방을 끌고 전철역 안으로 사라졌다.
아들 마음은 자꾸 커지고 있는데 엄마 혼자 속 좁고 제 돈 아끼는 녀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내 예상을 언제나 벗어난다. 이번에도 기분좋게 당했다.

오빠의 선물은 신발장 안에 있다.
아이들이 모두 다 학교로 간 다음, 내가 그 운동화를 꺼내 만져 보았다.
나도 이렇게 희고 고운 신발을 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더 하얗게 보이고 싶어

분필도 칠해보던 어린 날이..
윤정이는 좋겠다. 이렇게 고운 신발을 사주는 오빠가 있어서..

윤정이는 저만 선물을 받을 줄 안다.
아니다.
이 운동화는 무엇보다 남편과 내게 정말 잊지 못할 선물이 되었다.
여동생을 챙겨준 그 마음이, 그 마음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뿌듯해했을 그 마음이,
이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집에 들어올때의 그 마음이, 꺼내서 동생에게 건네주고
기뻐하는 여동생을 지켜보았을 그 모든 마음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필규도 윤정이도 모른다.


오빠의 선물.jpg



신발장 한 구석에는 필규에게 처음 사준 조그마한 운동화도 있다.
첫 아이가 자라서 늦게 걸음마를 한 후 뽁뽁 소리가 나는 아기 신발을 떼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운동화를 사서 신겼을 때의 그 벅찬 마음을 잊을 수 있을까.
이 운동화를 신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같이 걸을 때 분명 나는 세상 모두를 가졌다.
그때 이미 다 가졌다.

그 작던 아이가 자라 용돈을 모아 여동생에게 이쁜 신발을 사 주었다.
가족 모두 다 나간 집안에서 신발 두 켤레를 놓고 나는 또 펑펑 울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어떤 일이든 울지 않고서는 안되는 사람이 나다.
행복해서 운다. 이런 눈물은 언제든, 얼마든지 흘려도 좋다.

내일, 다시 아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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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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